[인터뷰]곽태선 세이에셋자산운용 사장
중세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는 아버지의 위대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사람의 아버지가 백 사람의 스승보다 낫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영웅처럼 보인다. 자라면서 이런 환상은 차차 깨지지만, 대신 아버지는 인생의 중요한 나침반이 된다.
곽태선(45) 세이에셋자산운용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영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뭘 하더라도 전문자격증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그는 공부벌레들의 집합소로 소문난 하버드법대 대학원을 선택했다.
나중 비즈니스맨의 꿈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변호사 자격증에 더해 내친 김에 법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지금도, 늘 미리 준비하고 끊임없이 실력을 쌓아 둬야 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늘 되새기곤 하지요."
금융부티크부터 자산운용사까지
미국에서 곽 사장은 잘 나가는 로펌의 증권·국제금융 및 상거래의 전문변호사였다. 88년 베어링증권 서울지점에 스카웃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지점장 겸 조사팀장을 맡았다. 그의 팀은 유로머니(Euromoney) 등 여러 유력지로부터 최우수 조사부서로 선정됐다.
"자산운용업계에서 성공하려면 마라톤 같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대로 하려면 많은 준비기간이 필요하지요."
전문지식에 더해 많은 경험을 쌓은 그는 92년, 드디어 자본금 5억원의 금융부티크 에셋코리아를 설립했다. 조사분석 및 투자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월급쟁이와 내 사업은 확실히 달랐어요. 첫 월급에 눈물이 나더군요. 일이 순탄하지 않던 초창기, 내 월급은 내가 투자한 자본금을 까먹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열심히 뛰었지만, 자본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이때 그동안 닦았던 실력과 인적 네트워크가 드디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양그룹 계열의 동양투자자문과 합병이 이뤄졌다. 피합병당한 셈이었으나, 최고경영자는 곽 사장이 맡았다. 자본력이 있던 동양그룹이 곽 사장의 경험과 노하우를 높이 산 결과였다.
곽 사장은 여기에 만족치 않았다. 제대로 된, 신뢰받는 자산운용기관이 되기 위해선 보다 큰 자본을 가진 주주가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곽 사장은 세계적인 자산운용회사인 미국의 세이 인베스트먼트(SEI INVESTMENTS)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세이가 새로운 대주주가 되면서 회사이름이 세이에셋으로 바뀌었다. 일임투자자문사에서 자산운용사로의 두번째 도약이었다.
리서치..가장 중요한 리스크 관리
SK글로벌 사태로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세이에셋의 편입자산에는 SK글로벌 채권이 하나도 없단다. 투신권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악령, 대우채에도 투자하지 않았다. "저희가 투자한 채권이나 주식을 발행한 회사가 부도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곽 사장의 제일 큰 자랑거리다. 운이 좋았던게 아니냐고 시비(?)를 걸어봤다. 곽 사장은 "결코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좋은 자산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만 리서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리서치는 제일 중요한 리스크 관리의 수단입니다."
리서치에 있어 곽 사장은 기업의 현금흐름을 가장 중요시 한다. 과거 10년치 이상의 재무재표 데이터를 분석해, 앞으로 5년치의 예상 현금흐름을 분석한다. 과거의 추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재무상황과 이익변화 추세를 한 눈에 파악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예측이나 파악이 어려운 거시경제와 투자정보만으로 자산운용을 하다보면 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 보다는 개별기업에 대한 철저한 재무 분석과 현장 정보수집을 통한 자산운용을 해야 실패의 확률이 줄어들지요."
대대로 신뢰받는 금융기관 만들터
곽 사장에겐 비서가 없다. 전화도 직접 받는다. 사장실도 없다. 그의 책상은 통사무실의 한 가운데 있다.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원칙은 분명했다. "자산운용사는 투명성이 최우선의 원칙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장이 뭘하는지 직원들한테 숨기는 게 없어야 합니다."
세이에셋 사무실의 모든 책상에는 바퀴가 달려있다. 선만 꽂으면 자유로운 이동과 부서배치가 가능하다.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자산운용사는 생각이 유연해야 합니다. 시장의 변화에 따라 손쉽게 팀을 짜서 일할수 있는 장점이 있지요."
곽 사장이 생각하는 우리 자본시장의 취약점은 신뢰가 없다는 점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현상도 신뢰부재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한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도 좋단다. 진지하면서도 제역할을 하는, 대대로 신뢰받는 금융기관을 만들고 싶은 것이 곽사장의 비전이다. "원칙을 정했다면 무조건 지켜야 합니다. 타협하고 융통성을 발휘하는 순간, 그 원칙은 이미 원칙이 아닙니다."
곽 사장은 지난해 세이에셋의 자본금을 120억원으로 늘렸다. 투신운용사로 변신해, 보다 다양한 금융상품을 취급하기 위해서다. "머지 않은 장래에 자본시장의 흐름은 은행이 아닌 자산운용기관이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크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자산운용기관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곽 사장은 아직도 많이 남은 마라톤 레이스를 위해 운동화 끈을 다시 단단히 묶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