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일엔 억척, 사람엔 푸근함"

[인터뷰] "일엔 억척, 사람엔 푸근함"

황숙혜 기자
2003.04.30 14:31

[인터뷰] "일엔 억척, 사람엔 푸근함"

“첫 인상이 차갑게 느껴져서 굉장히 깐깐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겪어보니까 물 같아요.”

한국IBM 설립 20여년 만에 지난 연초 첫 여성 임원이 된 이숙방(45) 상무보가 직원들로부터 종종 듣는 말이다. 82년 공채 1기로 입사했으니 21년 만이다.

그녀는 상무보로 발탁된 자신의 강점을 ‘편안함’이라고 자평했다. 사내 직원이든 고객이든 부담 없이 다가와서 업무나 개인적인 일들을 거리낌 없이 얘기할 수 있는 푸근함, 이 사람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준 것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공은 바깥으로 드러난 부드러움보다 내면적인 강인함, 스스로에 대한 냉철함에서 비롯된 것같았다.

 

# 고객이 원하는 것 이상을 해야

 

대학에서 가정학을 공부한 이 상무보가 진로를 전환한 것은 졸업을 앞두고 코볼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뭔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하지만 컴퓨터와 관련된 지식이라고는 학원을 다니며 배운 프로그래밍이 전부였던 그녀에게 입사 이후 접한 모든 것이 낯설었다. 밤을 새워가며 공부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현장에서 기술지원 업무를 수행하고 고객 기업의 직원들에게 IBM의 프로그램을 교육하려면 고객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는데 기술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일하며 틈틈이 자료를 찾아보고 집에 가서도 잠 못 자고 공부하기 일쑤였어요. 고객을 리드하기 위해서 관련 지식을 갖추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일이죠.”

 

주경야독하며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쌓는 억척스러움은 영업현장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한 달 후 미국 출장도 강행, 여걸의 면모를 보여줬고, 88년부터 3년 동안 울산에서 근무하며 당시 IBM이 새롭게 출시한 시스템을 현대중공업과 주리원백화점에 납품해 국내에서 첫 계약을 따내는 실적을 올렸다.

 

# 억척스러움

 

근성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진면모를 드러낸다. 현대중공업과 주리원백화점에 납품한 시스템에 에러가 발생했을 때 그녀의 억척스러움음은 진가를 발휘했다. “평소 고객들과 긴밀한 친분을 유지했기 때문에 집 전화번호를 서로 알고 있었어요.

문제가 발생하니까 시간을 안 가리고 전화를 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불려나가기 일쑤였어요.” 아예 두 달 가량을 전산실에서 숙직하며 달라붙은 끝에 문제를 해결한 것은 물론 시스템을 증설하는 쾌거를 이뤘고, IBM의 아시아퍼시픽 본부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IBM은 지난 2001년 새롭게 뛰어든 리눅스 사업의 총 책임을 이 상무보에게 일임, 그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 보였다. 리눅스의 오픈소스와 IBM의 프로그램을 접목하는 사업인 리코넷의 단장을 맡아 1년여 동안 조직을 이끌며 대한항공, 포스코, 포스데이타, 한국전력 등과 계약을 체결하는 기량을 보여줬다.

 

“계약을 한 건이라고 더 체결해 연봉을 올리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성공하기 힘들어요. 고객의 시스템 현황을 잘 알아야 하고, IBM의 시스템을 이용하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고객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바탕이 돼야 하죠. 그래야 고객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만족을 안겨줄 수 있고, 회사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실적을 올릴 수 있어요.”

 

# 매니지먼트

 

영업에 필수적인 술과 골프를 멀리하면서도 고객과 탄탄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데는 남다른 친화력이 깔려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펜팔을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미국, 일본은 물론 아프리카 지역으로 넓혔고, 입사 후 호주로 출장 갔을 때는 펜팔 친구의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제 기술서적이 아니라 경영과 관련한 책을 섭렵중이라는 이 상무보는 이상적인 경영자가 되기 위해 자신만의 특유한 푸근함과 친화력을 십분 발휘할 참이다.

 

“20여년 동안 일하면서 5년, 10년 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못했어요.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상사를 찾지도 못했죠. 구체적인 인생 설계를 했다면 이 자리에 좀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40여명의 직속 부하직원을 한 사람씩 만나며 그들의 일과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눌 생각이다. 직장 생활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함께 고민하는 한편 스스로 성공한 여성의 이상형이 돼 보이겠다는 다짐이다.

 

한 가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을 한다면 여성이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혼도 무시할 수 없는 변수라는 것. 일에 대한 권태로움으로 흔들릴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이 된 것은 남편과 두 아이를 길러준 시어머니라는 이 상무보는 “일을 계속하려면 결혼할 때 배우자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도 잘 살펴야 한다”고 귀띔하며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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