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외국 투기자본의 기업사냥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남자주인공의 직업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통해 돈을 버는 기업사냥꾼이다. 보유자산 가치대비 주가가 현저히 저평가된 기업을 먹이감으로 고른 후 치밀한 준비를 거쳐 해당 기업의 주식을 매집한다.
일단 대주주가 되어 이사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이 기업이 보유한 알짜배기 자산을 매각하여 돈을 챙기는 것이다. 또한 가능한대로 기업의 사업부문을 여러 개로 쪼개면서 기업분할을 시도하여 다른 기업들이 인수하기 좋게 잘라놓고 하나씩 팔아치운다.
마치 자동차를 헐값에 사서 엔진 따로, 문짝 따로, 핸들 따로, 조각조각 팔아 치우니까 자동차 값보다 더 많은 돈이 생기는 경우와 유사하다.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후 이 작업을 중지한다.) 경쟁력이 부족한 기업이 퇴출되는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일시적인 어려움에 빠져 주가가 하락한 기업이 잔인하리만큼 산산조각이 나면서 팔려나가는 모습은 그다지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작년에 1700억원의 자금으로 SK(주)주식 14.99%를 매입한 소버린은 사외이사로 5명을 추천했고 얼마전 이 후보들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내용인즉슨 핵심사업에 집중을 하기위해 SK(주)가 보유한 SK텔레콤 주식을 팔고 주변사업들을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문득 “귀여운 여인”의 남자주인공이 떠올랐다.
명분은 지배구조개선, 말하자면 재벌개혁이었지만 그들이 앞으로 하겠다는 작업들은 그저 적대적 인수합병에서 기업사냥꾼들이 벌이는 통상적인 행동의 공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면서도 재벌개혁 내지는 기업지배구조개선으로 포장하기만 하면 그럴듯해 보이고 동조자가 생기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문득 얼마전 스위스에서 만났던 WTO 담당자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지금 가난한 나라들은 산업화를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정기간 무역장벽을 쳐놓아야만 산업화를 하여 중진국으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데 이제 WTO체제 하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산업이 활짝 개방된 상태에서 가난한 빈국들은 벗어나기 힘든 질곡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참으로 행운이 따라준 셈이다. 냉전체제하에서 무역장벽이 어느 정도 용인되던 그 시절 우리나라는 무역장벽을 쳐놓고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시도했고 이 전략이 성공하여 1만달러의 고지에 다다랐다. 고도의 압축성장을 통해 중진국 수준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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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우리가 앞으로 새로운 산업과 기업을 얼마나 일으킬 수 있을지 매우 불확실하다. 우선 무역장벽구축은 불가능하다. 정부와 은행과 기업이 연결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삼각축은 깨진지 오래다.
모든 기업이 고위험-고수익과 연관된 신규투자를 꺼리고 있다. 은행들은 리스크관리에 급급해 하면서 기업금융자체를 아예 줄여버리고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소매금융에 치중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우리가 지금부터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육성하는 작업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제 지금까지 어렵게 육성해낸 기업들과 산업이라는 소중한 사회적 자산이 되도록 외국자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그리고 투기적인 자본에 의한 머니게임의 희생물이 되어 엄청난 국부유출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쓸 때다.
최소한 스스로의 소유지배구조자체가 의심스런 외국투기자본이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개선을 내세우며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막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