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횡령 부추긴 이상한 펀드 세제

[기자수첩]횡령 부추긴 이상한 펀드 세제

이경숙 기자
2005.08.16 08:02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군요."

한 자산운용업계의 세무사의 말이다. "횡령 유혹을 받을 만도 하죠. 자기 눈 앞에서 거금이 왔다 갔다 하는데, 더구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는 돈인데..."

랜드마크자산운용의 L모 차장. 닷새 전, 그러니까 그가 자신의 채권자와 가족, 자신의 통장에 회삿돈 28억원을 옮겨넣기 전만 해도 그는 국내 9위 자산운용사, 랜드마크자산운용의 번듯한 직원이었다.

이제 그는 쫓기는 몸이다. 11일 검찰은 그에게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횡령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본인 계좌로 넣은 24억원은 당일 바로 지급정지됐다. 회사가 지급 정지 소송을 통해 나머지 4억여원을 되찾지 못하면 그의 아내와 자녀, 그를 신원보증한 두 지인이 그 돈을 갚아야 한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그를 닷새 전 현실로 되돌려줄 순 없다. 하지만 '만약' 자산운용사의 채권펀드도 다른 금융기관처럼 7월부터 채권 이자소득 원천징수 의무가 면제됐다면? 그래도 그가 횡령 유혹을 느꼈을까?

그가 횡령했던 자금은 채권펀드 투자자로부터 국세청이 '채권 이자소득세' 명목으로 원천징수했다가 다시 돌려준 것이었다. 원천징수의 목적은 '세금 탈루 방지'. 이 과정에서 돈은 수탁은행, 국세청, 한국은행 국고과, 자산운용사의 고유계좌, 수탁은행을 거쳐 펀드 계좌로 돌아온다. 무려 5군데를 들른다.

당연히 기회비용이 높아진다. 자산운용업계는 한 해 평균 1조5000억여원이 이자소득세로 원천징수됐다가 환급된다고 전한다. 환급 소요기간은 45일. 그냥 채권펀드 안에 뒀다면 연리 4%로 약 77억원의 이자소득을 냈을 것이다. 그만큼 채권펀드 투자자의 소득도 늘었을 것이다. 또 이렇게 복잡한 행정, 회계 업무가 없었다면 자산운용업계는 업계 전체적으로 23억여원의 인건비를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업계의 불만이 높아지자 정부는 7월부터 은행, 보험, 증권, 뮤추얼펀드 등 금융회사, 즉 법인에 대해선 원천세 환급제를 폐지했다. 최근엔 채권 거래 투명성이 높아져 세금 탈루 걱정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건 일반 펀드 투자자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펀드투자자는 세금을 떼고 투자 소득을 받는다. 세금은 자산운용사, 즉 법인이 떼어 국세청에 낸다. 현실적으로 뮤추얼펀드나 일반펀드나 투명성엔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유독 일반 펀드 투자자금에 대해서는 원천징수제를 고수한다. 왜? 아마 법인과 개인에 차별을 뒀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우리도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조만간 대책이 발표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늦었다. 제도의 헛점에 유혹을 느꼈던 한 자산운용사 직원에겐 벌써 범죄자의 낙인이 찍혔다. 업계 요청대로 7월에 불합리한 제도가 폐지됐다면 그는 아마 오늘도 아이들의 아침 인사를 받으며 출근했을 것이다. 도둑뿐 아니라 문틈을 방치한 사람에게도 책임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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