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와 아이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경영권 분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매년 지배구조 우수기업으로 칭찬받던 KT&G가 외국 ‘기업 사냥꾼’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공격에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이 슬프다. 아이칸은 불과 6% 남짓한 지분을 확보했지만 KT&G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외국인 지분율이 60.72%나 돼 아이칸이 우호지분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불안한 탓이다. KT&G는 서둘러 골드만삭스와 자문계약을 맺고, 우호세력을 끌어 모으는 작업에 나섰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이렇다할 위험이 없지만(知彼知己 百戰不殆)이겠지만, 적(아이칸)도 모르고 나(우호세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앞날이 걱정스럽다.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 걱정
게다가 공격으로 인한 과실(果實)이 대부분 외국인의 손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슬프다. KT&G 주가는 지난해 10월 4만1000원대에서 15일 현재 5만6500원으로 37.8%나 올랐다. 아이칸은 이미 1600억원 이상의 평가익을 얻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이칸과의 경영권 분쟁이 이어져 배당이 늘어나고 주가가 상승할 경우 60%는 외국인이 차지하게 된다. 무엇을 위한 민영화였고, 누구를 위한 지배구조 개선이었는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런 현실을 만들어 놓은 한국의 총체적인 ‘인식 이상 증후군’이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 13일 "KT&G는 아이칸으로부터 도전받는 과정에서 기업경영과 지배구조가 튼튼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지배구조 우수기업인 KT&G가 투기자본에 공격당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제도와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회교도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도록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사막이 많아 물이 귀한 지역이어서 물 소비가 많은 돼지를 키우면 사람이 마실 물이 부족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크리스마스가 가까우면 사슴 스테이크를 특식으로 먹는다. ‘어떻게 루돌프를 먹을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슴 보기가 쉽지 않은 우리들의 관념일 뿐, 거기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한국에선 개고기를 먹고, 호주에선 양고기를 먹는 건 자연조건 차이에 따른 자연스런 문화일 뿐, 편견을 갖고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 강점 좀먹는 '인식 이상 증후군'
기업지배구조도 마찬가지다. 기업역사가 오래된 유럽은 주주는 물론 종업원과 고객 및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이익도 중시한다. 필요한 자금을 은행에서 빌려 쓰던 관행이 그런 지배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금과옥조처럼 여겨지고 있는 ‘주주중시 지배구조’는 미국 자본주의 역사에서 만들어진 ‘아메리칸 스탠더드’이다. 철도 자동차 등 성공이 불투명한 신산업에 투자하는 모험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주주(stockholder)의 이익을 다른 것보다 우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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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 문화가 섞여 있는 일본에선 최근 ‘기업은 주주 것이 아니다’라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미국식 지배구조가 확산되면서 일본식 경영이 위협받고 일본 기업들이 어렵게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반성에 따른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사람의 인식은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지식인과 공무원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메리칸 스탠더드의 함정에 빠져 한국의 강점을 갉아먹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