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가 탄광촌에서 목사로, 석탄을 캐는 광부로 잠시 일 할 때 그가 싸오는 동물성 지방을 바른 한 조각 빵 도시락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점심을 굶은 채 석탄을 나르느라 금방이라도 허리가 휘어질 것 같은 다른 광부, 혹은 길거리에서 만난 노랗게 뜬 얼굴에 눈은 퀭한 탄광촌 아이들에게 그 딱딱한 빵을 내주고는 본인은 홍차로 식사를 때우곤 했다.
고흐는 빵 값을 마련할 수가 없어 동생이자 지원자였던 태오에게 탄광촌의 사정을 얘기하며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곤 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었다. 쇠도 먹으면 녹일 수 있을 그 때, 친구들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배고픔을 참아야 하는 것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더 어려운 것은 담임선생님이 하던 혼식·분식 조사였다. 배고픔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로 넘길 수 있겠지만,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은 더 참기 힘들었을지 모르겠다. 4학년 때 총각이었던 담임선생님께서는 도시락을 여러 개 갖고 다니셨다.
선생님께서는 책상을 몇 개 붙여서는 돌아가며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는데, 꼭 도시락을 갖고 온 아이들과 도시락이 없는 아이들을 같이 부르셨다. 도시락을 갖고 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생각한 배려이자 나눔이었을 것이다.
문화평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과거에는 빵을 먹는 민족이 밥을 지어 먹는 민족을 지배했으나, 앞으로는 밥을 지어 먹는 민족이 빵을 먹는 민족보다 더 앞선 문명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했다.
빵은 휴대하기가 편해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행군 중에, 혹은 말을 타고 가면서 빵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군대의 전투력과 기동력은 가공할 만했다.
밥은 다르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도 뜨끈한 밥을 지어 음식이 식기 전에 모두 모여 앉아 함께 먹어야 했다. 서구의 빵 문화는 개인적인데 반해, 동양의 밥 문화는 집단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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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장인들 사이에 도시락이 유행이라 한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에다 경기불황이 겹친 탓에 건강도 챙기고, 생활비도 줄이려 도시락을 갖고 다니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덩달아 보온밥통 반찬통 등 도시락 용기들도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자신만의 도시락 요리법을 공개한 카페와 블로그도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이다. 직장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머니 또는 아내의 음식솜씨를 자랑하며 반찬을 나눠먹는 모습을 생각하면 보기만 해도 정겹고, 침이 꿀꺽하고 길게 넘어간다.
도시락은 단순히 한끼 식사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머니 혹은 아내의 마음과 정성이 한 그릇 오롯이 담겨있었다. 감동과 추억도 밥알 수만큼이나 그득했고 반찬만큼이나 맛있었다.
도시락은 메신저이기도 했다. 검은콩으로 밥 위에 수놓은 하트는 공부에, 직장생활에 지친 자녀와 남편에 대한 사랑과 희망의 메신저였다. 컴퓨터 한 켠에서 깜빡이는 정체불명의 외계 메신저를 거기에 비할손가.
어려운 때다. 장롱 속 금을 모아 IMF 환란을 극복했던 바로 그 집단의 힘을 다시 한번 발휘할 때다. 이런 때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각자 싸들고 온 도시락을 까먹으며 사랑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