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쇄신안 1년, 상처속에 변하고 있다

삼성 쇄신안 1년, 상처속에 변하고 있다

오동희 기자
2009.04.19 14:04

1년간 변화가 지난 70년간 변화 능가

↑삼성 서초본관 전경.
↑삼성 서초본관 전경.

2008년 4월 22일 오전 8시 출근길.

"오늘 긴급 기자회견이 11시에 있습니다"(삼성 전략기획실 홍보팀)

삼성특검의 수사결과가 발표된 4월17일 이후 5일만이다. 철저한 보안 속에 한 취재원으로부터 단 두 단어를 들을 수 있었다.

'퇴진과 해체'.

퇴진과 해체의 의미를 전략기획실을 이끌었던 이학수 실장과 김인주 사장이 퇴진하고, 전략기획실이 해체되는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하고 11시의 발표를 기다렸다.

하지만 발표 내용은 삼성 직원들에게는 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퇴진은 삼성을 20년간 이끌어온 이건희 회장의 퇴진을 의미했고, 해체는 그룹경영체제를 해체하고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일이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 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 안고 가겠습니다.(중략..)

국민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합니다. 오늘날의 삼성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 국민 여러분과 사회의 도움이 컸습니다. 앞으로 더 아끼고 도와 주셔서 삼성을 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워 주시기 바랍니다."

이 회장은 국민들께 드리는 말씀을 남기고 자리를 떠났고, 뒤이어 이학수 실장이 10가지 경영쇄신안 발표했다. 오는 22일이면 이같은 쇄신안이 발표된 지 1년이 된다.

◇삼성 10대 경영쇄신안=1년전 삼성은 다음과 같은 10가지 약속을 내놨다.

△이건희 회장의 퇴진 △홍라희 관장의 문화재단 이사직 사임 △이재용 전무의삼성전자(186,200원 ▲7,800 +4.37%)CCO 사임 △전략기획실 해체 △이학수 전략기획실 부회장과 김인주 사장 경영일선 퇴진 △차명계좌 실명전환 및 유익한 일에 사용 △금융사업 정도 및 윤리 경영, 은행업 진출 금지 △직무관련 사외이사 배제 △삼성카드 보유 에버랜드 주식 4~5년 내 매각 △이수빈 회장 그룹 대외 대표 및 업무지원실 신설 등이다.

지난해 4월 28일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대표 이사 회장 및 등기이사에서 사임했고, 6월5일에는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홍라희 관장과 함께 물러났다. 6월말에는 삼성전자 직원의 신분도 내놨다. 이재용 전무도 5월22일 삼성전자 CCO에서 물러났고, 이학수 실장과 김인주 사장도 7월1일부터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다.

차명계좌처리도 이 전 회장이 지난해말과 올초 삼성전자 주식 224만여주와 우선주 1만2398주, 삼성생명주식 16.22%(324만4800주), 삼성SDI 주식 39만9371주(0.9%)를 실명전환하면서 사실상 마무리했다.

삼성의 사외이사진에 직무상 연관성이 있는 사외이사는 선임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행했다. 3월 주주총회에서 삼성전자는 황재성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정귀호 전 대법관 등을 사외이사에서 뺐고, 최병윤 삼성SDI 사외이사(전 대구지방국세청장)와 박병일 삼성정밀화학 사외이사(전 마포세무서장) 등도 임기가 만료되면서, 재선임하지 않았다. 일부 관가출신의 사외이사가 남아있긴 하지만 쇄신안을 최대한 반영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아직 시한이 남아있는 삼성카드 보유 에버랜드 주식 매각이나 차명계좌의 실명전환 후 세금을 낸 나머지를 유익한 일에 쓰겠다는 일은 국세청의 과세가 이루어지면 마무리될 전망이다.

◇쇄신안 이후 1년=쇄신안 발표 이후 지난 1년간 쇄신안의 이행은 순조로웠다. 상당수의 경영진이 퇴진하고 독립경영체제로 전환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글로벌 경영위기가 겹치면서 삼성은 핵심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지난 4분기에 적자로 전환했다.

위기가 다가오고 있지만 이를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리더십 부재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재의 삼성은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당장 살아남는데 치중하고 있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나 구본무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이 그룹이 전면에 나서 미래경영을 외치고 있을 때 삼성은 여전히 대법원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다.

삼성은 향후 5년을 보는 미래경영보다는 당장 한분기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나리오경영을 펼치고 있다. 위기 상황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이 부재한 상황에서 삼성의 미래가 밝지만은 안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사장단협의회를 통한 독립경영체제가 안착했다고 하기도 여전히 힘든 상황이다. 현장 중심 경영으로 전환했지만 '중심축'의 부재를 여전히 느끼고 있다.

◇삼성 어디로 가나=일각에선 삼성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여전히 커튼 뒤에서 '누군가 조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권한만 있고 책임이 없는 자리로 물러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삼성을 곁에서 지켜봐왔다면 삼성 역사 70여년 동안 지난 1년여처럼 '죽은 듯 조용히' 지낸 적도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주주가 내놓고 경영활동을 할 수 없다는 자체가 변화를 얘기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따지듯 말하지만 심지어 봉사활동도 내놓고 하지 못했다.

글로벌 위기 대응에도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내놓고 말하지 못하고 지낸 1년이라는 게 삼성의 목소리다. 권한과 책임에 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정작 대표이사에 있을 때는 물러나라고 하고 물러난 이후엔 책임 있는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윽박지르는 소리에 삼성은 한숨만 내쉬고 있다.

이 전 회장의 측근은 이 전 회장의 최근 동향과 관련 "추운 날씨에는 림프종수종 수술 이후 후유증으로 밖으로 다니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회장은 올 들어서만 두차례 입원했다. 또 이학수 고문의 측근은 "과거에는 자주 방문하던 한남동 이 전 회장의 자택에는 한달에 한번 갈까 말까할 정도로 발걸음의 횟수가 줄었다"고 말한다.

사장단회의 때면 참석해 이 전 회장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던 이 고문과 김 상담역의 모습도 쇄신안 발표 이후에는 볼 수가 없다. 전 계열사 사장들이 참석하는 수요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1년이 지났다.

이재용 전무도 CCO에서 물러나 해외순환 근무에 나서 글로벌 위기극복에 나서고 있다. 지난 1년간 삼성의 변화는 지난 70년간의 변화를 능가하는 수준이었고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4월22일 발표한 쇄신안과 이행여부 비교
↑지난해 4월22일 발표한 쇄신안과 이행여부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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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기자의 생명은 현장에 있다' 머니투데이 산업1부 선임기자(국장대우)입니다. 추천도서 John Rawls의 'A Theory of Jus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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