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를 벗지도 못했던 중학교 1학년 초 때다. 서점마다 여러 종류의 책을 한꺼번에 꽂아 놓은 아크릴 회전판이 있었는데, 수많은 책 가운데 '삼중당'(三中堂)이 발간한 소설책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의 펄 벅이 쓴 '대지'(大地)였다. 이 책은 '대지'와 '아들들', '분열된 일가' 등 3권으로 이뤄져 있었다. 나는 당시 뭔가에 홀린 듯 이 장편소설에 빠져들었다. 밤을 새워가며 읽고, 수업시간에도 수학 선생님 몰래, 영어 선생님 몰래 읽다 책을 빼앗기기도 했다.
내가 읽은 '대지'는 영문학계의 거목인 고 장왕록 교수가 번역한 것이었다. 장 교수는 소설과 수필 등 펄 벅의 여러 저서를 번역할 뿐 아니라 지난 60년대 한국을 자주 찾은 그녀와 인터뷰 등을 통해 사적·공적으로 교류했다.
이렇게 최초의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과 영문학자 장 교수는 '창작과 번역'이라는 문학의 한 공간에서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들에게는 문학 외에 이들의 인연과 삶을 묶어주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펄 벅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이 심각한 정신장애을 앓았다. 장 교수에게는 소아마비를 앓는 딸이 있었다. 바로 장애와 암을 딛고 기적같은 삶을 살다 얼마 전 영면한 고 장영희 교수다.
딸은 소녀 때는 소아마비로 고생했고, 여성으로서는 유방암 척추암 간암 등 각종 암 덩어리를 안은 채 일생을 영문학자로, 교수로, 수필가로, 번역가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펄 벅이 쓴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는 책이 몇 년 전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펄 벅은 이 책에서 소녀에서 여성이 되기까지의 청춘과 사랑 결혼 가정 진실한 삶을 다루며, 여성의 책임과 그 잠재된 위대함을 일깨워 준다.
그녀가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를 쓰게 된 모티브는 그녀의 큰 딸과 헬렌 켈러여사다. 펄 벅 여사는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삼중장애'를 안고 평생을 산 헬렌 켈러에게서 받은 영감(inspiration)을 세상의 딸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큰 딸에게 헬렌 켈러의 치열했던 삶을 말하고 싶은 그녀의 '모성애'를 담았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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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왕록 교수는 다리를 쓸 수 없는 딸을 중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서울지역 여자중학교들의 문턱이 닳도록 돌아다녔다. 그는 집에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음에도 항상 평상에서 글을 읽고, 글을 썼다. 책상을 사용하기에는 몸이 불편한 딸을 위한 배려였다.
또한 다른 형제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나이 들어서도 혼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 즉 번역에 눈을 뜨게 하려는 아버지의 마음 씀씀이이기도 했다.
장 교수는 한번은 셋째 딸을 펄 벅에게 데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을 닮은 셋째 딸이요." 아버지는 선천적 장애를 앓고 있는 딸을 키우는 펄 벅과 함께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희망을 나누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딸이 몸은 좀 불편하지만 펄 벅이나, 펄 벅에게 많은 영감을 준 헬렌 켈러와 같은 삶을 살기를 마음 속으로 기원했을지 모르겠다. 이는 '영희야,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하는 울림이었을 것이고, 그 딸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불편한 다리로, 아픈 몸으로 똑같이 걸었다.
'삶' 자체를 '축복과 희망'으로 승화시킨 장왕록과 장영희, 펄 벅과 헬렌 켈러의 따뜻하고도 치열한 삶이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