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면, 회사이름이 나가나요?"
중견중소기업 CEO(최고경영자)들에게 설문을 요청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약속한듯 이같이 되물었다. 한 코스닥 상장사 대표는 "익명을 보장해주면 답변 내용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부 신설을 맞아 중소기업들의 생생하고 솔직한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100명의 중소기업 CEO 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 그 이름들을 공개하려던 계획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상황에 빠졌다.
여기저기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중소기업에게 대기업이란 행여 눈 밖에 나지는 않을까 눈치를 봐야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는 세상에 일일이 설명할 수 없는 '그들만의 법칙'이 공고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한 부품업체의 A 대표는 "지난해 말 대기업에서 내려보낸 공문 한 장에 협력사들이 납품 단가를 줄줄이 내려야 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B사는 올해 초 "우선 물량을 준비하라"는 대기업 임원의 전화 한통에 부랴부랴 물건을 생산했다가 이전의 말과는 다른 내용의 계약서를 받아들고 눈물을 삼키며 재고를 떠안아야했다.
대기업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중견·중소기업들이 이처럼 '쉬쉬'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결국 대기업 납품이 곧 회사의 '목숨 줄'이기 때문. 대기업의 눈 밖에 나면 가차없이 거래가 끊어지는 관행도 여전하다. 심지어 "우리 회사가 OO대기업과 거래를 시작했다"고 자체 홍보를 했다가 대기업에 불려가 반성문을 쓰고 앞으로는 외부 홍보도 허락을 맡고 하겠다는 약속 증서를 쓰고 왔다는 우스개 같은 이야기도 꾸준히 들린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상황마저도 대기업에 납품하지 못하는 다른 기업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대기업의 잘못된 관행 때문에 힘들다"며 힘든 소리를 하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대기업의 1차, 2차 협력사만 된다면 어느 정도 불합리한 처사도 감수할 수 있다"는 서글픈 상황도 벌어진다.
한 중소기업 CEO는 설문에 대한 응답지를 보내며 짧은 메시지를 추가했다. "설문에 답하다 보니 중소기업의 푸념이 돼버리네요. 저희들의 입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언제쯤 잃어버린 중기 CEO 100인의 이름을 떳떳하게 공개할 수 있을까. 창조경제 시대, 중견중소기업을 전담하는 중견중소기업부 기자로서의 책임감이 한층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