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체험기, 원시의 삶이 따로 없더라

블랙아웃 체험기, 원시의 삶이 따로 없더라

권성희 증권부장
2013.08.12 11:14

지금부터 30여년 전,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대여섯번 가량 정전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다. 서울 강남의 대단지 아파트에 살았음에도 그 시절에는 종종 정전이 됐다.

하지만 정전은 1~2시간만에 종료되고 곧 전기가 들어왔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정전은 재미있는 놀이로만 기억된다. 전기가 모두 나가 깜깜해지면 아파트 복도로 나와 아이들과 귀신놀이를 한다며 뛰어다니곤 했다. 안 그래도 정전으로 정신없는 경비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며 야단을 칠 때까지 귀신놀이는 계속됐다.

야단을 맞고 억지로 집에 들어가면 흐린 촛불 앞으로 손을 대고 그림자놀이를 하곤 했다. 깜깜해서 집 안이라 해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고 TV도 안 나오니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림자놀이뿐이었다. 부모님은 전기가 없는 게 그리 초조한지 5분마다 한번씩 "혹시 다른 집에는 불이 들어왔나 복도에 나가봐라"고 시키곤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던 정전이 엄청난 고통임을 실감한 것은 지난해 미국에서 특파원으로 일할 때였다. 지난해 10월말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동북부를 강타, 전봇대가 줄줄이 넘어지면서 뉴욕주와 뉴저지주 상당 지역이 정전이 됐다.

이 정전은 어린 시절에 몇 시간 만에 복구되던 정전과 달리 지역에 따라선 10일 이상 지속됐다. 나 역시 7일간 전기 없이 생활했다. 전기 없는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문명에서 밀려난 원시인에 가까운 삶이었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때는 10월말. 오후 5시에도 밖은 밝지만 실내는 어둑어둑해져 온다. 실내가 어둑해져오는 오후 5시만 되면 집안에서 할 일이 없다. 충전이 안 되니 당연히 노트북과 휴대폰 사용은 안 된다. 외부와 단절된 삶이다. 다른 지역은 전기가 들어왔을까 궁금하지만 정보가 차단돼 있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책이라도 읽으라고? 그건 정전을 겪지 못한 이들의 사치스런 착각일 뿐이다. 어둑한 촛불로 책을 읽는 것은 고역이다. 게다가 시력이 나빠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빨리 눈이 피로해지는지 상상 이상이다. (이 때 경험을 계기로 나는 전기 없던 시절에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 엄청난 연구로 업적을 세운 사람을 존경하게 됐다. ‘그 어두운 불빛에서 그렇게 공부하다니 그들은 인간이 아닌 게야’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럼 어둑해지면 뭘 했을까? 촛불 켜놓고 부르스터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끓여 끼니를 때우는 거다. 어두워서 설거지도 다음날 날 밝을 때로 미뤄야 한다. 끼니를 때운 후엔 이불 깔고 누워 가족들과 수다 떠는 거밖에 할 일이 없다. 가족 간이라 해도 뭔 할 얘기가 그리 많으랴. 얘기하다 하다 지겨워서 미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눈을 감고 온갖 생각을 다 하다 잠이 들게 된다.

참, 부르스터는 정전 때 필수품이다. 가스로 작동하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려면 고깃집에서 쓰는 점화기가 필요하다. 점화기가 없으면 종이에 불을 붙여 가스레인지 위에 놓고 가스레인지를 켜야 불이 붙는다. 가스레인지조차 처음 점화할 때는 전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점화기가 없는 가정은 부르스터를 꼭 마련해 두시길.

'정전이라 할 일이 없으면 밖에라도 나가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착각이다. 정전이 되니 주유소가 일제히 문을 닫았다. 주유하는데도 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때 알았다. 언제 전기가 들어올지 몰라 휘발유를 아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더욱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미국 사람들은 폭풍우나 허리케인, 눈 폭풍 예보만 나오면 일단 주유소부터 가서 기름을 채워놓는다.

그리고 주부들에겐 냉장고가 큰 문제다. 정전이 되면 냉장고 가동이 중지되기 때문에 음식이 상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식료품 상점들은 정전이 하루 이상 지속되면 냉동고, 냉장고에 있던 식품들 상당 부분을 폐기 처분해야 해서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다.

블랙아웃이 예상된다면 냉동고, 냉장고, 김치냉장고를 최대한 가볍게 할 일이다. 블랙아웃 때 유용한 식품은 물론 라면, 햇반(밥솥도 사용할 수 없으니 필수다), 후라이팬에 구워먹기 간편한 스팸(계란은 냉장고에 안 넣어두면 상할 위험이 있다), 밥 반찬으로 먹을 수 있는 즉석김과 참치캔을 비롯한 각종 깡통 제품 등이다.

아울러 블랙아웃 때를 대비해서 빨래는 미리미리 해둬야 한다. 세탁기가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옷을 자주 갈아입는 여름에는 상당히 곤란할 수 있다. 전기를 아끼라지만 블랙아웃 때를 대비해 빨래가 나올 때마다 매일 세탁기를 돌리는 편이 낫다.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라 정전이 되면 더위가 문제일 것이다. 안 그래도 찌는 날씨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이, 부채질만으로 더위를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하지만 내가 겪었던 블랙아웃은 10월말에서 11월초, 아침 저녁으로 추울 때였다. 난방이 전기랑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혀 난방이 되지 않아 추위가 사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과거 우리나라가 가난했을 때 쓰여졌던 소설을 읽어보면 머리는 이불도 덮지 못해 새벽녘에 급격히 차가워진다며 머리가 추워서 잠을 깬 뒤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표현들이 나온다.

나는 이런 표현들을 읽어도 도무지 머리가 너무나 서늘해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을 몰랐는데 허리케인 샌디로 겪은 블랙아웃 덕분에 이해하게 됐다. 머리 끝부터 차가워져 냉기가 발끝까지 전달되는 그 느낌은 서늘함과 소름 끼치는 느낌을 합해 놓은,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마도 지금 한국에 블랙아웃이 닥친다면 그건 엄청난 더위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밤이 되면 얘기하거나 잠 자는 것외에 할 일이 없고 날이 밝을 때도 주유를 못해 발이 묶여 꼼짝 못하고 동굴 같은 집 안에서 사는 삶. 블랙아웃의 삶은 문명에서 내팽개쳐진, 결코 달갑지 않은 원시의 삶, 무엇인가 재미나 지적 탐구를 추구하기 어려운 암흑의 삶, 온 몸으로 추위나 더위와 싸워야 하는 자연의 날씨 속에 온전히 노출된 고난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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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희 기자

안녕하세요. 국제부 권성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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