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행동주의 원년…'주총 전쟁' 시작됐다]대안 없이 주주권 행사만 고민하다 '골든타임' 놓쳐…10% 룰에도 발목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가 1일 한진칼에 대해 정관변경이란 제한적인 경영 참여를 결정한 것은 이사 해임, 신규이사 선임 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 시 그에 따른 후속 절차에 필요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직면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기매매차익 반환 등 10% 룰에 발목이 잡혔다는 분석이다.
주주제안을 통해 적극적인 주주권을 처음으로 행사했다는 명분은 챙겼지만, 실질적인 경영 참여 주주권행사가 불발되며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 도입 취지가 크게 후퇴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촉박한 이사 추천 후속 절차…10% 룰에 발목 잡혀=기금위는 이날 한진칼에 대해서는 정관변경에 한해 제한적인 경영 참여 주주권을 행사하고 대한항공에 대한 경영 참여 주주권은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 이 같은 결정은 주주제안에 따른 후속 절차와 10% 룰과 관련한 법적 걸림돌 등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오늘 회의에서 참석자들 간 다양한 의견 교환을 바탕으로 결국 합의를 이룸으로써 다행히 표결까지 가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며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적용을 위한 첫 사례에서 모범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한진칼과 대한항공 등에 이사 해임이나 사외이사 선임 등 이사회 구성과 관련한 적극적인 주주제안을 하려면 오는 8일까지 주주제안서를 발송해야 한다. 설 연휴를 감안하면 주주제안을 위한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물리적으로 오는 8일까지 이사회 구성과 관련한 주주제안은 가능하다. 하지만 후임 신임 이사 추천을 위한 후보 선정 등 실무 작업 시간이 부족하고 후보 선정 후에는 인사 검증을 거쳐야 한다. 자칫 무리하게 서두를 경우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가 졸속으로 추진됐다는 비난에 휩싸일수도 있다.
국민연금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대한항공이나 한진칼 등의 경우 항공, 운송, 물류, 고객서비스 등 전문지식이 있는 이사진이 필요하다"며 "신임 이사 후보를 추천하려면 인재풀을 구성하고 사전검증과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없다"고 지적했다.
수탁자책임위나 국민연금 내부에서도 "논의의 시작부터 잘못됐다"는 반성이 나왔다. 주주권 행사 여부만 고민할 게 아니라 대안도 논의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잇따라 열린 각종 회의에선 사외이사 후보 리스트조차 오르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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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측 한 기금위 위원은 "이날 회의에선 주주제안과 관련해 세부 기준도 없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통과를 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는 발언이 많이 나왔다"며 "그러다보니 절충안을 찾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했다.

오는 3월 주총에서 이사 후보를 추천한다고 해도 최대주주인 조양호 한진그룹 오너 일가와 표 대결 결과가 불투명해 자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현행 자본시장법상 경영 참여 선언 시 6개월 내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해야 하는 '10% 룰'이란 법적 걸림돌도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에 발목을 잡았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11.56%를 보유, 10% 룰 적용을 받는다. 지분 변동이 없으면 문제 될 게 없지만, 변동 시 100억원 넘게 토해내야 한다.
금융위원회가 국민연금의 10%룰 예외적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고, 재계는 물론 지역 가입자 대표, 정부 등 상당수 기금위 위원들이 이날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로 단기매매차익을 반환하면 수익률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 기금위 위원은 "3명의 사용자 대표가 모두 단기매매차익 반환에 따른 수익률 악화에 우려를 나타냈다"며 "이에 대해 각각 6명의 지역 가입자 대표와 관계 전문가, 정부 위원 등 다수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대한항공의 경우 경영참여 반대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고 했다.
국민연금은 반면 한진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한진칼의 경우 지분 7.34%를 보유한 3대 주주여서 10%룰을 적용받지 않아 '정관변경'이란 제한적인 경영참여 주주권 행사를 결정했다.

◆조양호 회장 해임 근거 마련, 이사연임 반대 적극 행사=국민연금은 한진칼의 정관변경을 통해 조양호 회장의 해임 근거를 마련했다. 대한항공 대표이사 연임 반대 등 의결권도 적극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정관 변경안은 이사가 회사 또는 자회사와 관련하여 배임, 횡령죄로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가 확정된 때에는 결원으로 본다는 내용이다. 만일 제안이 주총에서 통과되면 현재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 회장을 재판 결과에 따라 해임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지분 구조상 조 회장 측의 동의 없이 정관변경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정관변경은 특별결의 사안으로 주총에서 발행주식의 과반수 출석, 출석 정원의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조양호 회장과 특수관계인의 한진칼 지분은 28.95%다. 우호지분 4.5% 정도만 확보하면 어떤 경우든 특별결의에서 이길 수 있다. 주총 출석률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조 회장 측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KCGI와 국민연금이 뜻을 같이하게 되면 18.05%다. 45%에 달하는 기타주주가 힘을 합쳐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정관변경을 제안한 것은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평가된다.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후 첫 ‘경영 참여’ 사례를 좌초시키지 않고 기금의 수익성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고육책을 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민연금은 지난달 마련한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 행사지침) 세부가이드라인을 추가 보완, 적극적인 경영 참여와 의결권 행사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지난 16일 1차에 이어 이날 2차 기금위 회의에서 주주권 행사 가이드라인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며 "기금위 산하 수탁위에서 가이드라인 보완 작업을 진행해 기금위에 보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