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국내 도입을 지시한 경구용 낙태약 '미프진'(성분명 미페프리스톤)에 이어 사후 피임약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고개를 든다. 사전 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약국에서 살 수 있지만 되레 급히 써야 하는 사후 피임약은 전문의약품이라 병원에 가서 의사 처방을 받아야 한다. '성 건강권 보장'이란 정부 정책 기조는 물론 세계적인 흐름과도 배치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일반의약품으로 전환 요구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23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이달 초 발표한 '한국 여성의 피임 현황과 시사점'을 보면 2025년 기준 13~18세 청소년 67.3%, 19∼39세 62%, 40~64세 26.2%가 성관계 시 항상 피임한다고 응답했다. 2022년 각각 54.6%, 52.2%, 25.4%였던 것과 비교해 특히 가임기 여성에서 피임 실천율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번 설문은 청소년 대상자가 52명으로 통계적 유의성이 낮았다. 가임기 여성이 포함된 19~39세의 피임 방법은 콘돔(57.8%)이 가장 많고 질외사정(13%), 그다음이 사전 피임약(7.5%)으로 나타났다. 성관계 이전에 쓰는 사전 피임약과 달리 성관계 이후 사용하는 사후(응급) 피임약은 1.6%로 전체 피임법 중 페미돔(여성 피임기구, 0.3%) 다음으로 가장 적어 차이를 보였다.
사전·사후 피임약은 여성 호르몬 농도를 조절해 배아 착상을 방해한다. 다만, 사전 피임약은 저용량을 오래 먹어 호르몬을 조절하는 반면 사후 피임약은 고용량을 한 번에 투여해 호르몬을 급변시킨다. 이에 사후 피임약은 출혈이나 두통 등 부작용 위험도 더 커서 상시적인 피임법으로 추천되지 않는다.

현재 사전 피임약은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 있지만, 사후 피임약은 병원을 찾아 의사 처방받아야 하는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돼있다. 2012년 의약품 재분류 시 정부 주도로 일반 약으로 전환이 추진됐지만 의료계와 종교계 등의 반발로 무산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는 "이후 진행된 실태조사 결과 오남용 등이 우려돼 2015년 현행 체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성관계 직후 사용해야 하는 사후 피임약이 전문의약품으로 묶여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성관계 후 빨리 먹을수록 피임 효과가 높은데 병원이 휴진하거나 주변에 없을 때, 야간이나 주말, 심리적인 부담 등에 방문을 꺼려 '쓸 수 있는 약'조차 못 쓰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해외 100여개 국가는 처방전 없이도 사후 피임약을 사용할 수 있다. 옆 나라인 일본도 지난 2월부터 사후 피임약 '노레보'의 약국 구매를 허용했다. 전국 7000여곳의 약국에서 7480엔(한화 약 6만7000원)에 약을 구매할 수 있으며 만약 사용자가 성폭행 피해자로 판단될 경우 약사가 지원 센터로 안내할 수 있게 제도를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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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영 NHK에 따르면 일본 후생성(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도 오남용 등을 이유로 2017년 일반의약품 전환 결정을 연기했지만, 세계보건기구(WHO)의 '부작용은 경미하다'는 판단과 사회적 요구 등에 따라 2023년부터 시범사업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 △복용 전 건강 체크리스트 작성 △교육된 약사에만 허용 △인근 산부인과와 협력 △개별 공간에서 현장 복용 등의 원칙을 마련하고 약사 판매 시스템을 구축하며 일반 약 전환의 기틀을 닦았다.
시민단체인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이런 소식이 알려진 직후 자료를 내고 "사후 피임약의 피임 성공률은 24시간 이내 복용 시 약 95%에서 48시간 이내 85%, 72시간이 지나면 58% 수준까지 떨어진다"며 "사후 피임약은 '사전 예방'도 '임신 중단'도 아닌, 여성의 건강과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응급수단"이라며 일반의약품 전환을 재차 촉구했다.
제약계 관계자는 "임신인지 아닌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자 스스로 판단해 복용하는 약이 사후 피임약"이라며 "진료의 영역이 아닌 만큼 본인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약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됐지만 지금도 오남용을 견제할 마땅한 장치는 없다"며 "피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과거보다 향상하고 있는 만큼 과다복용 시 위험성이나 부작용 대처법을 더 많이 교육·홍보하는 게 효과적"이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