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오늘… '평화로운 하늘 문' 앞 피바람 불다

27년 전 오늘… '평화로운 하늘 문' 앞 피바람 불다

진경진 기자
2016.06.04 06:02

[역사속오늘]수천명 희생 中 톈안먼 사건, 아직 피어나지 못한 민주주의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맨 몸으로 탱크를 맞선 모습으로 유명해진 '탱크맨'.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뉴시스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맨 몸으로 탱크를 맞선 모습으로 유명해진 '탱크맨'.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뉴시스

피의 일요일이었다.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는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했다. 탱크와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밀어냈고 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발포가 시작되자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잠시 흩어졌던 군중들은 다시 뭉쳐 사람 장벽을 만들었고 일부 시민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계엄군의 전진을 막았지만 잠시뿐이었다.

유혈 진압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지방 주요 도시에서도 시민과 학생들이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내 주요 도로에서도 일반 시민들이 나서 군의 베이징 진입을 저지했다. 군은 이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달리는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27년 전 오늘(1989년 6월4일) 발생한 톈안먼 사건이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의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는 자유·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흑묘백묘론'과 '선부론'으로 잘 알려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공산당의 부패가 심각해지자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톈안먼 사건의 실질적인 계기는 1987년 1월 3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나섰다가 20여명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면서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에게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게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과 생각이 달랐던 후 총서기는 시위를 적극 진압하지 않았고 결국 축출됐다.

후야오방이 실각한 또다른 이유는 개혁 때문이다. 중국의 경제 개혁에 성공한 후야오방이 정치 개혁까지 시도하려고 하자 덩샤오핑을 비롯한 보수파의 반발이 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이 심근경색으로 숨지자 대학생들은 '후 전 총서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요구하고 나섰고 곧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로 이어졌다.

톈안먼 앞 시위대는 후야오방의 장례식날 10만명으로 불어났고 5월20일 계엄령이 선포됐음에도 톈안먼 사건 직전까지 1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공산당은 시위 초기 무력 진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자진 해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중국 전역에서 시위를 지지하고 나서자 덩샤오핑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 이후 총서기로 등용된 자오쯔양에게 시위대를 향한 무력 진압을 지시했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그 역시 총서기직에서 실각하게 됐다.

결국 덩샤오핑은 중국에 방문한 당시 러시아 서기장인 고르바초프가 고국으로 돌아가자마자 군을 베이징으로 들여보내 경고없이 시민들을 공격했다.

민주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체포도 이어졌다. 결과는 공산당의 승리였다.

공산당은 진압 과정에서 319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외신들은 희생자 집계가 어렵지만 최소한 수천~수만 명이 희생됐다고 추측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희생된 시위자들을 언급하며 "중국에선 100만명이라도 적은 숫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톈안먼 사건은 국제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고 국제적인 제재도 가해졌다. 하지만 국제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톈안먼 사건이 모두 진압된 후 민주주의는 다시 음지로 숨어들었고 사회주의는 더욱 견고해졌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