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위크]World News/홍찬선 특파원의 China Report<15>
“손님의 항공권은 이미 다른 사람이 이용해서 추가로 발권할 수 없습니다.”
베이징(北京)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 대기업의 이한국 씨(가명)는 지난해 12월, 베이징셔우두(首都)국제공항의 A항공사 발권창구에서 이런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대경실색한 이씨가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자 창구직원은 “2시간 전에 다른 손님이 와서 여권을 제시하면서 사정이 있어 먼저 가야 한다며 200위안(약3만6000원)의 위약금을 내고 발권 받아 탑승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비행기 표를 발권하려면 여권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누군가 이씨가 예약한 항공권을 발권 받아 탑승했다면 그가 이씨의 여권을 갖고 있다는 뜻.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여권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전에도 누군가가 ‘자신의 여권’을 이용해 중국에서 호텔을 예약하고 숙박했다는 얘기를 들었던 이씨. 자신의 여권을 위조한 가짜 ‘이한국 여권’이 돌아다니는 게 분명했다. 그냥 넘어가면 더 큰 피해를 입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이씨는 공항에 있는 공안(경찰)에 ‘나의 위조여권으로 항공권이 발권됐다’고 신고했다. 공안이 해당 항공사 창구를 찍은 폐쇄회로TV(CCTV)를 확인해 보니 2시간 전에 한사람이 와서 이씨의 위조여권으로 항공권을 발권 받는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공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위조여권이 있다는 것과 위조여권으로 본인의 항공권을 발급받는 ‘범죄 현장’을 확인했지만 ‘한국인의 여권이 위조돼 돌아다니는 것은 한국의 문제이지 중국의 문제는 아니다’라는 태도였다.

◆‘베이징 호구’의 힘
중국에 살면서 겪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중국에서 18년이나 살고 있는 김서울 씨(가명)는 몇년 전에 여권을 날치기당한 뒤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화가 치민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 4거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렸다. 파란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급하게 다가오더니 아픈 사람이 있으니 좀 태워달라고 했다. 마침 처가에 급한 약속이 있어 정중하게 거절한 뒤 신호가 바뀌어 가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차가 잠깐 세워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를 세웠더니 '뒷자리에 가방이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해서 뒤돌아보니 가방이 없어졌더라."
김씨는 다음날 선전(深圳)으로 출장가기 위해 평소에 집에 모셔두던 여권을 항공권과 다소의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과 함께 그 가방에 넣어두었다. 여권이 없으면 당장 내일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게다가 재발급 받으려면 ‘범죄인’ 취급을 받는다. 아차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급하게 차를 돌려 아까 그 장소로 가보니 아프다며 차를 태워달라던 사람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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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처가에 도착한 그는 장인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여권분실 사실을 신고하러 파출소에 갔다. 이때부터 그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처가에서 가까운 차오양(朝陽)구 파출소에 갔더니 “여기 관할이 아니니 여권을 분실한 장소의 관할 파출소에 신고해야 한다”고 했다. 여권을 날치기당한 곳이 타이양꿍(太陽宮)과 왕징(望京)의 접경지역이어서 일단 타이양꿍 파출소로 갔더니 왕징 관할인 화자디(花家地)파출소에 신고하라고 했다. 화자디파출소에 갔더니 “외국인은 베이징 공안국 외사과로 가서 신고해야 한다”고 떠넘겼다. 전형적인 ‘핑퐁(탁구공 떠넘기기)’이었다.
김씨는 베이징(北京)대와 칭화(淸華)대를 졸업했다. 부인은 ‘베이징 호구’가 있는 중국인이다. 베이징 인구는 현재 상주인구만 약2000만명,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30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베이징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베이징 호구가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베이징 정부와 공안국에서도 베이징 호구를 가진 사람은 함부로 대하지 않고 특별대우를 한다.
한밤중에 파출소 네다섯군데를 오가는 동안 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내 집사람은 베이징 호구를 가진 중국인이다. 장인이 나서면 이리저리 떠넘기며 일을 처리하지 않는 당신들도 곤란해질 수 있다”며 큰소리를 치자 한 파출소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 형사기동대 담당자가 “반드시 찾아줄테니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당신 가방을 날치기한 사람인데 가방을 버스정류장 지붕에 놓아놨으니 지금 와서 찾아가라”고 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형사기동대가 날치기한 가방을 찾기 위해 현장을 수사하기 시작하자 겁먹은 날치기범들이 가방을 돌려줬으니 신고를 취하해 달라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관성 없는 '入國問禁, 入鄕隧俗'
중국에서 황당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한때 ‘CAAC'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중국항공은 항상 캔슬(China Airline Always Cancel)’이라는 뜻의 줄인 말이다. 요즘도 중국항공이나 동방항공 등 중국항공사들의 항공기 연발과 연착은 자주 일어난다. 30분 늦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고 1시간, 2시간 지체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도 중국인들은 그다지 항의하지 않는다. 성격 급한 한국인들이 큰소리로 따지면 중국인들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본다.
중국에 상주하는 외국인들은 비자를 받기 위해 매우 귀찮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중국에 도착하면 먼저 거주지의 관할 파출소에 가서 ‘임시 주숙등기(住宿登記)’를 한 뒤 건강검진(만18세 이상만 해당, 1인당 검진비 600위안)을 받아야 한다. 주숙등기 및 건강검진 결과 사본과 중국근무 명령서, 사진, 여권 등 필요서류를 갖춰 관할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상주비자를 신청한다. 서류에 이상이 없으면 신청 뒤 1주일 뒤에 비자를 찾는다.
이렇게 설명하면 무지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 필요한 서류를 갖추는 게 만만치 않다. 심하게 얘기하면 접수창구 직원에 따라 요청하는 서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관계증명원이 대표적인 예다. 대부분은 한국에서 영어로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이면 되는데, 중국어로 된 주민등록등본을 내야 한다며 접수받지 않는 직원도 상당수 있다. ‘옆 창구에서는 되는데 왜 안되냐’고 따져봐야 소용없다.
게다가 외국인들은 매년 연말에 상주를 위한 비자를 다시 발급받아야 한다. 임기가 10월에 시작된 사람이라면 중국에 왔을 때 비자를 받고 두달 뒤인 연말에 이듬해 비자를 신청해 갱신해야 한다. 1인당 400위안(7만2000원)의 비자발급 비용을 부담하면서. 본인은 물론 가족의 비자도 함께 매년 받아야 한다.
중국어에 ‘루궈원진, 루샹수이수(入國問禁, 入鄕隧俗)’라는 말이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그 나라, 그 고장에 가면 그곳의 법과 풍습을 따르고 지키라는 뜻이다. 중국에 왔으니 중국에서 원하는 절차에 따라야 하고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만 ‘루궈원진’이란 이유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을 뒤풀이해야 하고 당할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따궈쥐에치(大國崛起: 큰 나라로 일어서다)’하려는 중국으로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