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전인 2017년 2월 13일 오전 9시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내 자동발권기 앞에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이때 여성 두 명이 남성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에 차례로 수상한 액체를 발랐다.
이후 남성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공항의 안내 창구로 이동해 도움을 요청했다. 공항 내 의무실로 이동한 남성은 의식을 잃었고, 구급차로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숨진 남성은 북한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이었다.
45세 젊은 나이의 김정남이 북한으로부터 암살당한 셈이다. 김정남은 2001년 위조 여권으로 일본 입국을 시도하다 체포돼 추방됐고, 이후 후계 구도에서 탈락하면서 중국, 마카오, 태국 등에서 도피 생활을 해 왔다.

북한 김정남 피살 사건 초기에는 두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암살을 시도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CCTV 영상만 보고 김정남이 '독침'에 의해 살해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이후 여성 두 명이 김정남 암살에 사용한 것은 'VX' 등 신경 독가스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무색무취인 VX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로, 사린가스의 100배에 달하는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VX를 흡수할 경우 뇌와 중추신경계가 손상돼 10여분 만에 목숨을 잃게 된다. 이에 유엔(UN)은 1991년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VX를 대량살상무기(WMD)로 분류한 바 있다.
두 여성이 차례로 김정남 얼굴에 바른 물질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VX가 생성된 것으로 분석됐다. 숨진 김정남 얼굴에서는 0.2㎎/㎏의 VX 성분이 검출됐는데, 이는 치사량의 1.4배에 달했다.

북한 김정남 얼굴에 독성물질을 바른 두 여성은 말레이시아 수사 당국에 의해 체포됐다. 29세 베트남 국적의 도안 티 흐엉, 25세 인도네시아 국적의 시티 아이샤였다.
이들은 당시 한화 기준 10만원가량의 돈을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 두 사람 모두 연예인 지망생이었는데, 북한 당국의 관계자로 추정되는 한 남성으로부터 "재밌는 동영상 촬영에 협조해 주면 유튜브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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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말한 재밌는 동영상의 내용은 모르는 남성의 얼굴에 기름을 바른 뒤 당황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두 여성은 그 말을 믿고 김정남에게 접근했던 것이고, 자신들은 독성물질이 아닌 단순한 기름으로 알고 있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후 진행된 재판에서 △두 여성이 범행 후 천천히 걸어 현장에서 떠난 점 △도주 과정에서 공항의 화장실에 들른 점 △사건 발생 후 공항에 다시 찾아와 순순히 체포된 점 등이 인정됐다. 이에 두 여성은 살인죄 처벌을 받지 않았다. 도안 티 흐엉만 상해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시티 아이샤는 무죄로 풀려났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아무 힘도 없이 도피 생활 중인 김정남을 굳이 암살했을까. 사건 이후 일본 매체 NHK는 김정남의 죽음이 장성택 숙청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NHK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의 고모부이자 실세였던 장성택은 2012년 중국에 방문했는데, 당시 후진타오 주석과 만나 김정남의 귀환을 바란다는 말을 했다. 이런 사실이 김정은 귀에 들어가면서 2013년 말 장성택이 숙청됐고, 약 3년 후 김정남까지 암살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2019년 미국 매체 워싱턴포스트는 다른 주장을 펼쳤다. 이에 따르면 해외에서 북한 망명 정부 설립을 추진하던 단체 '자유조선' 리더 에이드리언 홍 창이 김정남에게 "망명 정부의 지도자가 돼 달라"고 부탁했다.
김정남은 "조용히 살고 싶다"며 해당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피 생활 중인 김정남을 지속해 감시하던 북한 당국은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고, 내용을 보고받은 김정은이 위기감을 느껴 형을 암살했다는 게 워싱턴포스트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