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에너지: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
<2>핀란드가 뜨는 이유, 데이터센터 '생태계'
①입지부터 따졌더니 전력망 문제 NO

핀란드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약 560㎞ 떨어진 인구 3만6000여 명의 도시 카야니. 카야니 도심에서 울창한 숲길을 20여 분 걸어가자 낡은 벽돌 건물들이 놓인 넓은 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요한 북유럽의 숲과 거대한 공장 지대의 흔적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이곳은 축구장 100개에 해당하는 약 70만㎡ 규모의 산업단지 '렌포르신 란타'다.
투박한 공장 건물 사이를 꼼꼼히 살펴보면 전혀 다른 시대의 공존이 포착된다. '창고(VARASTO)'라는 핀란드어가 적힌 건물 한쪽 벽면에는 글로벌 데이터 기업들의 로고가 걸려 있다.


렌포르신 란타 내 유럽연합(EU) 슈퍼컴퓨터 '루미(LUMI)'가 자리한 데이터센터 건물에서도 옛 산업시설과 첨단 인프라의 대비가 다시 한번 한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홀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알루미늄 외피 구조물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그 안쪽으로는 슈퍼컴퓨터의 랙(Rack)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시선을 올리자 높은 천장 너머로 수십 년 전 지어진 투박하고 거친 콘크리트 보와 빛바랜 벽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인공지능(AI)의 첨단 두뇌와 옛 공장의 거친 골조가 한자리에 공존하는 풍경이다.

제지공장 닫은 자리, 데이터센터 들어서다
이 산업단지에는 한때 핀란드 제조업의 중심이자 세계 굴지의 제지업체였던 UPM이 연간 64만 톤의 신문·잡지용 종이를 만들던 대형 제지공장이 있었다. 카야니 경제를 떠받치던 곳이었지만, 디지털화에 따른 종이 수요 급감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한파를 버티지 못하고 끝내 가동을 멈췄다. 제지산업의 쇠락과 함께 이 지역 일자리 530여 개도 자취를 감췄다.
도시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건 역설적이게도 제지공장이 남긴 '유산'이었다. 목재를 펄프로 가공하고 종이를 압착·건조하는 제지업은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산업이다. 공장은 멈췄지만 대규모 전력을 끌어 쓰던 230메가와트(㎿)급 변압설비와 고압 송배전망은 그대로 남았다. 데이터센터 구축의 최대 난제로 꼽히는 전력망 확충과 계통 접속 대기 시간을 줄이고, 관련한 기반시설 투자 비용도 아낄 수 있는 결정적 이점이었다.
핀란드 과학·연구용 IT 서비스 공공기업 CSC가 헬싱키 권역에 있던 데이터센터 확장을 추진하며 2010년 카야니를 새 부지로 낙점한 배경에도 이 전력 기반시설이 있었다. 실제로 카야니시의 연간 전력 소비량은 제지공장이 가동되던 2007년 1877GWh(기가와트시)에서 폐쇄 직후인 2009년 475GWh로 급감했다. 대규모 제조업 전력 수요가 한순간에 빠져나간 자리에 데이터센터가 둥지를 튼 셈이다.
독자들의 PICK
지금 830명 읽는 중

"데이터센터는 전기에서 시작"
지난달 17일 카야니 루미 데이터센터에서 만난 유하 오이노넨 CSC-핀란드과학IT센터 데이터센터 총괄은 "데이터센터는 모든 것이 전기에서 시작된다"며 "제지공장이 가동을 중단했을 때 그대로 남은 기반시설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 카야니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다"고 했다.
전력 설비뿐 아니라 옛 공장 건물 자체도 그대로 사용했다. CSC는 건물을 새로 짓는 대신 거대한 공장 외피 안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과거의 공간에 미래 산업을 덧입히는 상징적인 효과는 물론 신축 과정의 탄소배출을 대폭 줄이기 위한 실리적 선택이다.
에바 소카 핀란드 CSC 데이터센터 생태계 담당 매니저는 "건물 안에 건물을 만드는 방식을 택하면 필요한 공사량이 줄어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했다. 2027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같은 공장 안에 짓는 '루미 AI' 데이터센터도 이런 '건물 속 건물'로 만들어진다.

19조원 구글 투자 이끌다
CSC가 2010년대 초반 카야니의 옛 공장 부지에 과학·연구용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며 물꼬를 튼 이후, 보레알리스 등 상업용 데이터센터 기업들도 속속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카야니 산업단지 사례처럼 가동이 멈춘 제조업 부지를 데이터센터로 탈바꿈시키는 전략은 핀란드 전역의 핵심 투자 유치 모델로 자리 잡았다. 최근 구글이 발표한 대규모 핀란드 투자 역시 지난 10여 년간 유휴 제지공장의 부지 전환을 성공적으로 검증해 온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구글은 지난달 9일 카야니를 비롯해 무호스, 바알라, 하미나 등 핀란드 거점 지역에 2027~2028년까지 최소 130억 유로(약 19조 원)를 투입해 신규 데이터센터를 짓거나 관련 인프라를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구글은 이미 지난 2009년 핀란드 남부 하미나의 옛 제지공장을 인수해 데이터센터로 탈바꿈시킨 바 있다. 유휴 산업 인프라를 발 빠르게 전환해 온 핀란드의 브라운필드 전략(기존 산업부지 재활용)이 세계적인 AI 데이터센터 확장기와 맞물려 대규모 투자 결실로 이어진 셈이다.
핀란드 정부 산하 투자진흥청 비즈니스핀란드의 유시 오케르베리 성장 서비스 프로그램 총괄은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구글의 이번 투자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라며 "하미나 데이터센터 구축 이후 오랜 기간 쌓아온 상호 신뢰와 협력 체계가 맺은 결실"이라고 했다.

※본 기획 취재는 한국기자협회와 기후미디어허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