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질 담보할 좋은 기회 vs 이색 편법과 출고가 압력

'세월호' 참사 영향으로 출판시장이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다. 참사가 벌어진 4월 16일 전후로 출간된 책의 마케팅은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영세 출판사 사장들은 "책을 만들지 않는 게 남는다"는 말을 할 정도다. 정부가 나서 1년에 한 번 대대적으로 치르는 '세계 책의 날'(4월23일) 행사도 취소됐다.
이 가운데 '도서정가제 개정안'이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2010년부터 시행된 현 도서정가제는 발행일로부터 18개월 미만 '신간도서'는 19%까지 할인이 가능하고 18개월 지난 '구간도서'와 실용서, 초등학생 참고서 등은 무제한 할인이 가능했다. 이번 개정안으로 모든 책값은 앞으로 10% 이내로 할인해야 한다. 또 물품·마일리지·할인권·상품권 등 부수적 할인혜택은 책값의 5% 이내로 제한된다.
신간과 구간 구분 없이 일괄적으로 할인율 15% 이내로 적용되는 것을 골자로 한 도서정가제 개정안 시행은 올 11월 중순부터. 출판계는 대체적으로 "개정안으로 모든 서점의 '공정경쟁'이 시작된 것"이라는 환영의사를 밝혔지만 일부에선 '또 다른 편법'과 '있는 자의 힘의 논리'를 우려한다.
일부 오프라인서점은 "표면적으로는 골목서점을 지키는 명분을 고수하지만 결국 온라인서점의 또다른 편법과 횡포가 적용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반면 온라인서점들은 "정가제와 상관없이 도서를 포함한 쇼핑 구매력은 이미 온라인으로 넘어온 상태"라며 "시장 위축은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개정안으로 힘을 얻게 된 '동네 서점'
표면상 개정안의 최대 수혜자는 '동네서점'이다. 그간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형서점의 대폭 할인율에 밀려 생존 자체를 위협받은 동네서점들이 일제히 환영의사를 나타냈다.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장은 논평을 내고 "출판생태계 정상화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만큼 독자들의 신뢰를 되찾는 정직한 가격 찾기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 따르면 동네서점은 2011년 말 2577곳에서 지난해 말 2331곳으로 10% 줄었다. 문구류를 제외한 순수 책만 파는 서점은 1625곳에 불과하다. 이번 개정안은 동네서점 상권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다.
하지만 익명을 요구한 한 출판업계 관계자는 "개정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재고할 여지가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책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은 직접 확인하고 꼼꼼히 따지는 다른 쇼핑과 달리 내용과 저자만을 확인하고 구매하는 즉시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온라인서점이 여전히 유리하다"며 "동네서점 활기라는 취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독자들의 PICK!
◇'베셀' 보유한 대형출판사 중고판매로 꼼수?
개정안엔 발행일로부터 18개월 지난 책은 정가를 재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 조항 때문에 베스트셀러를 보유한 대형 출판사들이 편법을 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가격을 대폭 할인, 아예 중고서점으로 출고해 싼 책을 구하려고 하는 소비자들을 유인할 가능성이다.
한 온라인서점 관계자는 "1만5000원인 신간이 18개월 지나 1만원으로 할인된 가격에 중고시장에 들어가도 아무런 제지가 없다"며 "결국 대형 출판사만 혜택을 보는 정책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헌책방의 책과 정가가 재조정된 책의 차이가 불분명해 2차 지하시장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미 대형 출판사들이 재고로 쌓인 책들을 대폭 할인을 적용, 조만간 시장에 무더기로 방출한다는 얘기가 나돈다. 시행령에 이같은 '편법'을 막을 조치가 포함돼야 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 출판사, 출고가 타격 우려도
개정안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서점의 동반 성공을 목표로 공정경쟁과 다양성 확보'를 지향한다. 그러나 출판사 입장에서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온라인서점과 대형 오프라인서점들이 출고가 인하를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출판사 주간은 "가격과 관계없이 유통사인 (온·오프) 서점들은 정해진 독자층이 있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이 없다"며 "반드시 읽어야할 책의 출고가를 낮추도록 유도해 결국 서점의 이익이 더 늘어나는 구조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온라인서점의 무기는 할인이 아니라 노출"이라며 "노출을 핑계로 출판사들에 낮은 출고가를 요구하며 장난칠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망했다.
◇질과 다양성 담보하는 시대 열릴까
개정안에 대한 여러 우려에도 출판업계는 '여행'이나 '힐링' 등이 장악한 실용서 위주 책들에서 벗어나 질적 업그레이드와 다양한 장르의 서적이 쏟아질 가능성에 주목한다.
마니아를 대상으로 전문서적을 발간하는 한 출판사 사장은 "개정안 전엔 할인 제안을 여러 곳에서 받았지만 책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측면에서 수용하지 않았다"며 "이번 개정안으로 좀 더 당당하게 자존심을 지키며 책을 낼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또 다른 소규모 출판사 사장은 "이익률이 아닌 매출경쟁에 노출된 출판사들이 이젠 다양성과 질로 경쟁해야 한다는 인식을 싹틔울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