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 오늘… '민족의 선각자' 해방 못보고 눈감다

78년 전 오늘… '민족의 선각자' 해방 못보고 눈감다

박성대 기자
2016.03.10 06:11

[역사 속 오늘] 도산 안창호 선생 서거

도산 안창호 선생./출처=위키피디아
도산 안창호 선생./출처=위키피디아

"내가 일찍 모든 것을 희생하고 우리 민족을 위해 작정한지 오래였고 가정의 행복을 희생한지 오래였을뿐더러… 오직 혁명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것"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폭탄 의거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된 도산 안창호가 그 해 1월 16일자로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는 그 이후로도 한 차례 더 옥고를 치르다 얻은 간경화 증세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78년 전 오늘(3월 10일) 서거한다.

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의 작은 섬 봉상도(도롱섬)에서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창호가 16살 되던 해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청일전쟁 등을 지켜보면서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 여기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같은 해 청일전쟁을 피해 경성로 이사한 것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는 경성 정동제일교회를 지나가다 우연히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으니 우리 학교로 오라'는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구세학당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안창호는 신학문을 배워 '의식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는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돼 활동한다. 1907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 1909년 '청년학우회'를 만들면서 청년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1913년엔 '흥사단'도 조직해 민족 계몽운동과 국권회복 활동에 힘을 쏟는다.

안창호는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으며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옥고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다가 해방을 7년 앞두고 숨을 거둔다. 특히 병상에 무의식중에서도 일본 천황을 규탄하는 소리를 지르며 병원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1962년 안창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이름은 미국에도 남겨졌다. 2002년 LA 고속도로에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라는 표지가 세워지고, 2004년엔 '안창호 우체국'이 붙으면서 미국 정부건물에 한국계 인사의 이름이 붙게 된 첫 사례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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