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된 '공주'로 살지말고 '겨털'길러 성 정체성 도전하면…"

"포장된 '공주'로 살지말고 '겨털'길러 성 정체성 도전하면…"

김고금평 기자
2016.09.03 03:22

[따끈따끈 새책] '여자다운게 어딨어'…남장, 삭발, 겨털 등 성 역할 바꿔보는 실험 통해 평등권 환기

#1. 남자친구가 여자 친구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여자는 민낯을 바꾸기 위해 화장에 의상에 각종 치장을 한 뒤 30분쯤 뒤에 나타난다. 남자 앞에 나타난 여자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장된 ‘공주’ 같다.

#2. 오빠가 어지럽힌 집 뒷정리는 언제나 여동생의 몫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해온 집 정리 습관을 무의식적으로 배운 학습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오빠가 ‘가부장제를 강화하자’는 철학으로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건 아니다. 여성의 무급 가사노동에 가치를 두지 않는 체제의 산물을 알게 모르게 ‘수용’하고 믿었을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사회적 여성성은 도처에 깔려있다. 살은 빼야 하고, 밋밋한 얼굴에 화장은 필수이고, 체모는 역겨우니 면도기로 밀어야 한다.

날씬해지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그 방식에 맞춰 우리는 매일 ‘연기’를 해야했는 지도 모른다. 때론 그런 연기를 통해 받게 되는 찬사를 즐김으로써 더욱 여성성을 강화하려고 애쓴 건 아닌지.

이 책의 저자 에머 오툴은 ‘여자다움’에 대한 시각을 180도 방향에서 고쳐 생각한다. 남성 위주의 판을 뒤엎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고, 페미니스트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역설한다.

시작은 겨드랑이털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오툴이 영국 지상파 방송에서 사회의 미적 기준에 순응하라는 상대 패널에 맞서기 위해 18개월간 기른 겨드랑이털을 번쩍 들어 올린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여성의 체모는 수치스럽고 제거해야 할 것이라는 암묵적 사회 분위기에 한낱 털이 ‘젠더 논란’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여성은 자신의 몸에 수치심을 느끼도록 조건화됨으로써 자본주의의 이상적인 소비자가 되었다. 몸의 문제에서 내게는 조금도 선택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여성이 부엌을 책임지는 건 한국이나 아일랜드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사촌 언니가 남자들은 젊으나 늙으나 빈둥거린다며 비난하자, 저자는 “여자라서 돕는 게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돕는 거지”라고 말한다.

‘여자다움’을 애써 연기하며 살아온 오툴도 19세 때 자신의 젠더를 다르게 연기해보기로 결심한다. 실험은 다양한 범주를 오간다. 핼러윈 밤에 남자 옷을 입고 남자로 사는 자유를 누리거나, 파티에선 상의를 탈의한 남성과 함께 웃옷을 벗어 던지고 일상 언어에서 남녀의 구분을 지운 대화를 시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뿌리 깊은 체제에 맞서는 건 쉽지 않다. 그래도 갈등을 일으키는 행동은 멈출 수 없다. 저자는 “고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부드럽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주변과 불화를 낳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동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도록 강하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실험을 통해 던지는 변화는 모두가 털을 기르고 화장품을 불태우는 급진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긴 머리는 수동성을 의미하지 않아야 하고, 짧은 머리는 공격성을 의미하지 않아야 한다. 중요한 건 여성성의 상징이 아니라, 상징에 결부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뜻을 지닌 영어 ‘휴매너티’(humanity)엔 ‘남성’(man)이 포함돼 있고, 여성이 손에 반지를 끼는 순간 ‘미스’는 ‘미시즈’로 변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1819~1901년)에 소년들은 분홍색을, 소녀들은 푸른색 옷을 즐겨 입었다. 색깔이 뒤바뀐 풍경은 고작 60년 전에 시작됐을 뿐이다.

오톨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멋 내고 싶을 땐 멋지게 차려입고, 화장하기 싫을 땐 민낯으로 다니라는 것이다. 삶의 방식을 생식기의 종류로 규정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는 것. 젠더를 비틀어보는 노력은 그 변화의 첫 단추다.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펴냄. 408쪽/1만6000원.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김고금평 기자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산다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