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폭력 사라진 자리에 꽃핀 문화예술…노래·입담·퍼포먼스 등으로 시민들과 연대

"원래 '말달리자'는 우리 노래였는데…우리가 이러려고 '크라잉넛'을 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말은 독일로 달려가는 것도, 이화여대로 달리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가 달려야 할 곳은 청와대입니다."
12일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민 100만 명이 모인 광화문광장. 시민들의 연대를 더 견고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인들의 무대였다. '블랙리스트'와 정치검열, 비선들의 문화사업 개입 등으로 문화예술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노래나 입담, 퍼포먼스 등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의 목소리를 낸 것. 30년 전 거센 투쟁과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문화가 피어났다.
'100만 촛불집회'(주최측 추산)를 문화예술로 이끈 주역들은 '블랙리스트'로 이름이 거론되거나 음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뱉는 비주류 예술인들이었다. 이들은 공격적이거나 주류에 대항하거나 약간은 '삐딱한' 시선의 노래들로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예술인들로, 개사한 가사들을 강한 분노와 함께 섞어 토해낼 때마다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이날 광화문 광장 무대에 오른 밴드 크라잉넛은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딸로 승마 관련 각종 특혜 의혹을 받는 정유라씨를 풍자하며 히트곡 '말 달리자'를 불렀다. 정부를 향한 성남 민심을 반영하듯 '닥쳐'라는 후렴구를 따라 부른 시민 수십만 명의 목소리가 분노의 메아리로 분출됐다.
대국민 위로곡 '길가에 버려지다'를 무료로 배포하고 '박근혜 하야하라'라는 현수막을 자신의 소속사 건물에 내걸었던 가수 이승환은 자신의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노래 '덩크슛'의 가사는 "주문을 외워보자. 오예~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해 마냥 창피한, (그래서) 요즘 분발하고 있는 이승환"이라고 소개하며 "이들(최순실, 고영태, 우병우, 박근혜 대통령)로부터 너무 많은 폭행을 당하는 느낌"이라고 밝혀 호응을 받았다. 이씨는 오는 18일 '길가에 버려지다' 두번째 버전을 공개할 예정이다.
얼굴 없는 가수로 오랫동안 '바닥 민심'을 대변해온 래퍼 조PD는 "순실의 시대가 상실의 시대"라고 개사한 노래를 불렀고 저항 민중 가수로 대표되는 정태춘은 "내가 사는 나라는 선이 악을 물리치고 염치가 파렴치를 이길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언제나 조롱당해왔다"며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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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대표적 '좌파 예술인'으로 분류돼 온 방송인들도 합류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오늘 이 자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최순실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여러분 각자의 이름이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절대로 쫄지 마시고 여러분들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또 헌법 조항을 읊으며 박 대통령이 내란과 외환의 죄를 모두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더 이상 분노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운을 뗀 김미화씨는 "내가 '쓰리랑 부부'할 때 늘 마지막에 외치던 말이 '무조건 방 빼!'였다"며 시민들과 함께 "(박 대통령은) 무조건 방 빼!"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번 정부에서 문체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임옥상 화백은 이날 서울시청 서울도서관 앞에서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대형 얼굴 상에 못을 꽂아 넣는 퍼포먼스를 참석자들과 함께 선보였다.
인사동 쌈지길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는 이진경 작가는 '지금이 아이를 구하고 나를 구하고 나라를 구할 때',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먼저 간다', '잡것들이 망친 나라 우리들이 살려낸다', '자유는 흐르는 것' 등의 구호를 담은 피켓을 준비해 참가자들이 해당 피켓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이날 열린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운집, 1987년 6월 항쟁 이후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