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재숙 문화재청장

11일 아침, 우리 군 수송기가 제주산 귤을 싣고 제주공항을 출발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0kg들이 상자 2만 개에 담긴 귤은 어제에 이어 오늘도 두 차례 하늘을 날아 북쪽 주민들이 평소 먹기 힘든 남쪽 과일의 맛을 전해줄 것이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귤의 속살을 즐기며 웃음 지을 북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가 멎은 한반도의 하늘을 이제는 한민족이 나눠먹는 과일을 실은 공군 항공기가 난다.
지난 달 4일, 바로 이 과일 수송기를 타고 ‘2018년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다녀왔다. 2004년 북의 고구려 고분벽화 실태를 취재하러 처음 평양 나들이를 한 지 14년 만이었다. 그때는 언론인 신분이었고, 이번에는 문화재청장 자격이다. 40대 초반 호기심 넘치던 문화전문기자로서 처음 만나는 고구려 무덤 벽화는 놀랍고 신비로웠다. “고구려의 도공이 막 붓질을 마치고 떠난 듯 형형색색 벽화의 질감이 생생하다”고 썼던 기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그때 기념사진을 찍었던 을밀대는 의구했으나 당시 우리 취재진을 안내하던 김 선생과는 재회하지 못했다.
평양 체류 사흘 동안 젊은 지도자가 이끄는 북의 변화를 가장 보여주고 있다고 느낀 건 한마디의 구호였다. ‘과학으로 비약하고, 교육으로 미래를 담보하자.’ 남쪽 방문단을 처음 데려간 곳이 ‘과학기술전당’이었고, 마지막 날 태풍 영향으로 일정이 연기돼 덤으로 본 곳도 자연사박물관이었다. 평양중앙식물원에는 우리 문화재청이 키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옮겨 심은 소나무가 지난 11년 남북 관계의 변화를 상징하듯 3m50cm로 자라 푸르고 싱싱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10월 1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강원도 철원 평화전망대와 DMZ 현장을 둘러봤다. 남측 비무장지대 안에 자리한 태봉국 철원성 남북 공동조사를 위한 설명회였다. 태봉국은 신라 왕족 출신이었던 궁예(?~918년)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를 꿈꾸며 세웠던 나라였다. 짧은 재위 기간이었지만 궁예의 자주 개혁적인 정치 이념은 왕건을 통해 고려로 이어졌다. 망원경으로 관찰한 태봉국의 흔적은 무심한 억새풀에 덮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남과 북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의 무게는 보는 이 모두의 가슴을 묵직하게 치고 들어왔다.
태봉국 신도읍 자리는 한국전쟁의 최고 격전장이었던 철의 삼각지 중 하나다. 현장브리핑을 맡은 이진형 제6사단장은 “순찰할 때 성벽의 자취를 보았지만 태봉국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때라 무심히 넘겼다”며 아쉬워했다. 염동열, 이동섭 의원은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똑같이 나뉜 땅 무늬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보물이라고 평가했다. 유례를 찾을 수 없게 극적인 민족과 자연의 역사가 녹아든 이곳을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해 한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대물림해야 한다는 국회의원들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젊은 연구원 7명은 지금 개성에서 북쪽 단원들과 함께 고려 궁성인 만월대를 발굴하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남북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3대 정부에 걸쳐 꾸준히 지속되어왔다. 2015년에 멈췄다가 3년 만에 재개된 남북간 역사문화협력의 대표 사업이다. 올해 고려 건국 1100년을 맞아 더 뜻 깊은 발굴 현장에서 오순도순 한반도 문화유산의 미래를 논하고 있을 소장 학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며칠 뒤인 26일에는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남과 북이 각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신청한 씨름의 공동등재가 결정된다. 지난 10월 17일,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프랑스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씨름의 남북 공동 등재를 추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문 대통령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화답한 터다. 만약 이 꿈이 이뤄지면 씨름은 유형 무형을 통틀어 남북한 공동으로 유네스코 등재 목록에 오르는 첫 번째 유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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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용 수송기가 폭탄 대신 귤을 나르고, 한반도를 둘로 가르던 땅에서 총 대신 삽을 든 젊은이들이 문화유산을 발굴한다. 한국전쟁 70돌을 맞는 2020년, 남북의 문화유산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