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인 저의 경험과 역량을 믿어주시고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은행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신 대통령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권선주 기업은행장이 지난해 말 취임사에서 밝힌 말이다. 사석도 아니고 개인서신도 아닌, 기업은행 전체 직원들에게 전하는 공식 취임사에서 한 얘기라는 점에서 뒷말이 없지 않았다.
스스로 '여성'을 강조했기 때문일까. 권 행장의 일거수일투족은 취임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여성 은행장'이 하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어딜 가든 최초의 여성은행장, 유리천장을 깬 인물, 파격인사라는 말이 뒤따라 다닌다.
권 행장만이 아니다. 박근혜정부 등장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는 주목받는 여성 리더들이 많이 기용됐다. 서영경 한국은행 부총재보,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처럼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인사들 외에도 정부나 공공기관, 심지어 민간기업에서도 여성들의 기용이 눈에 띄게 늘었다.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그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들이 많지만, 여성이란 점이 더 부각되는 게 현실이고 당사자들도 '여성'타이틀에 큰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반면 얼마 전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경제수장이 된 재닛 옐런(Janet Yellen)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벤 버냉키 전 의장의 양적 완화 정책을 지지해온 연준 내 대표적 비둘기파로 주목받아온 그는 취임 후 스스로 "여성의장(chairwoman) 아닌 의장(chair)으로 불러달라"고 연준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폄하하는 주변의 시선을 극복해야 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사회 유리천장 파괴의 진앙지는 두말 할 것 없이 첫 '여성 대통령'이다.
지난해 첫 대통령 업무보고에서는 여성 공무원들의 자리가 항상 대통령 왼편 테이블에 배치돼 '바뀐 세상'을 실감하게 했다. 각 부처도 업무보고 현장에 과장급 이상 여성 공무원을 총동원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여자라서 (리더가)됐다"고 깎아내리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능력은 경쟁자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떨어지는데, 현 정부에서 여성으로 혜택을 입었다는 묘한 뉘앙스다. 파격인사이긴 한데, 능력을 최우선으로 한 파격이 아니라 성(性)의 파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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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리더란 타이틀은 주목을 받는 동시에 한계이다. 그가 업무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았던 사람인지, 평소 어떤 소신을 가지고 있는지는 철저하게 묻힌다. 오히려 '독기'만 부각된다. 임신 중 토요일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에 아이를 낳았다는 식이다.
물론 여성이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금녀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금융 리더의 자리에 여성이 앉은 것은 그간 소외됐던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리더 경쟁에서 이기거나, 자리에 올라서도 계속 여성으로 부각되는 일은 우리 사회 다른 여성들에게도 득 될게 없다.
능력과 소신으로 인정받고, 스스로도 그걸 바라는 리더의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