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한발전소 4월 차관 상환완료...작년 1000억원 국내 송금하고 향후 8년간 수익 내
필리핀 전력인프라 든든한 한 축, 가동중단 연 1일도 채 안돼
세부발전소는 현지서 "정전 없애준 발전소" 찬사

마닐라에서 한국전력 일리한발전소로 향하는 세 시간 남짓의 버스 여정은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그대로 요약해서 보여줬다. 마닐라 시내엔 마천루와 소비경제의 핵심인 메가쇼핑몰의 위용이 대단했다. 하지만 교외로 나가 도심을 벗어나니 필리핀 경제의 민낯이 보였다. 군데군데 땜질된 좁은 도로를 따라 판잣집이 즐비했고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목적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필리핀 경제는 오랜 식민지배의 여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취약한 제조업기반과 동남아국가이면서도 부족한 천연자원, 특정 계층의 정치·경제 권력 독점, 인근 국가들의 압박, 부패한 정부 등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단단히 쥐고 있다. 당연히 SOC(사회간접자본)나 인프라 투자도 뒷전이다. 대중교통망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2차대전 당시 미군 지프를 개조한 차량인 '지프니'가 여전히 서민들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일 정도다.
한국전력의 대규모 필리핀 현지 투자가 다시 조명받는 것은 이런 열악한 현지 여건 탓이다. 한전은 일리한발전소 하나만으로도 지역 전력수요의 10%를 공급하고 있다. 필리핀에 핵심인프라를 제공한 셈이다. 필리핀은 한전이 처음으로 해외로 진출한 사업임과 동시에 한전 해외투자의 최대 성공작이다. 무조건 지원한 것도 아니다. 사업이 된다. 작년 한전은 필리핀에서 총액 1014억원을 국내로 송금했다. 누적배당이 900억원 정도였지만 전력을 팔아 번 돈도 100억원이 넘었다. 해외서 벌어 국내서 부채를 줄이는 셈이다.
◇PF로 발전소 짓고 차관 전액상환, 향후 8년간 빚없는 회사=일리한발전소는 한전이 총 사업비 7억2100만달러 중 1억7800만달러를 대고 나머지는 일본 등의 금융기관에서 차입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방식으로 지었다. 2002년 가동을 시작해 지난 4월 차관 5억4300만달러를 전액 상환했다. 빚을 내 지은 후 돈을 벌어 갚은 것이다. 황화연 일리한발전소장은 "차입금 상환을 완료하던 날 주요 고객들과 관계자들을 불러 파티를 열었다"며 "직원들이 모두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일리한발전소의 발전용량은 1200MW다. 원전 한 기 수준의 발전용량이다. 평상시 가스를 때고, 가스공급이 중단되는 비상시에는 석유를 연료로 활용한다. 연료를 태워 나오는 강한 열기로 한 차례 터빈을 돌려 발전한다. 거기서 나오는 열기로는 물을 끓여 고압증기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또 다른 터빈을 돌려 전기를 일으킨다. 한 가지 연료를 활용해 별도의 터빈을 돌려 발전효율을 극대화하는 가스복합발전 시스템이다.
필리핀정부와 약속한 일리한발전소의 사업시한은 20년. 오는 2022년까지 한전이 운영한 후 산미구엘이 운영권을 넘겨받게 돼 있다. 맥주회사로 유명하지만 최근 에너지 및 인프라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기업이다. 차관 상환을 완료한 만큼 운영권이 이전되기 전까지 향후 8년간 모든 수익을 한전이 가져갈 수 있다. 한전이 5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지분에 따른 지속적인 배당도 기대할 수 있다.
독자들의 PICK!
일리한의 성공은 말라야발전소(총 사업비 2억6300만달러) 사업을 통한 현지 업력축적 덕분이다. 한전은 1995년부터 2011년까지 말라야지역에 650MW규모 중유화력발전소의 재가동 복구공사 및 운영사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바 있다. 한전 최초의 브라운필드(해외기업 직접투자) 사업이었다. 15년의 가동기간 동안 무고장 운전을 달성했다. 수익금은 내몽골이나 중국 산서성 지역에 재투자하는 등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다양한 투자경험도 획득할 수 있었다.

◇사고로 가동중단 1년에 1일 미만, '선동렬 방어율'=한전이 현지서 높이 평가받는 비결은 결국 높은 기술력과 철저한 현장관리다. 일리한발전소는 올해 필리핀정부로부터 10.95일(0.3%)의 정지허가를 받았다. 수리나 계획에 따른 정지가 아닌 갑자기 발생한 사고나 이상으로 인한 가동정지를 연중 10.95일까지 허락한다는 것이다. 10월 현재까지 이중 0.48일만 사용했다. 반나절 정도다. 올해 뿐 아니다. 최근 3년 연속으로 가동중단이 연평균 1일 미만이다.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이 최근 청문회에서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필리핀 내 다른 발전소의 경우 연중 정지율이 7%에 달한다. 한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내년 필리핀에는 최악의 전력비상이 예고돼 있다.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가장 크게 깨지는 해다. 위기를 앞둔 필리핀 정부의 가장 믿음직한 전력공급 동반자는 한전이다. 황 발전소장이 청문회에 직접 증인으로 출석해 전력수급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장차관급 비상회의에 불려가 자문역할을 한 경우도 벌써 여러번이다.
황 발전소장은 "발전소는 기계와 화학, 환경, 전기 등 모든 요소가 망라된 '산업의 종합예술'인 만큼 운영의 안전성이 생명"이라며 "일리한발전소의 정지율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이른바 발전소 계의 선동렬 방어율인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전 최초 진출 당시 필리핀의 발전소들은 말 그대로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새는 구조였다"며 "필리핀과 한국 정부의 협력이 필리핀 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부 전력도 한전이 책임져 "정전 없애준 회사"=휴양지로 유명한 세부에도 한전의 발전소가 있다. 세부 사람들은 한전을 "정전을 없애준 회사"라고 부른다. 수시로 전력공급이 중단돼 정전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2011년 한전이 세부발전소를 가동하면서 세부 지역에서는 정전이 사라졌다. 200MW급 석탄화력발전으로 한국 내 발전소들에 비하면 소규모지만 세부지역 전력공급에는 무리가 없다.
세부발전소는 한전 최초의 머천트(사업주가 전 과정 수행) 사업이다. 발전소 건설과 운영은 물론 원료조달과 발전된 전력 판매계약까지 직접 책임지고 수행한다. 이를 위해 3개 기업과 장기 석탄조달계약을 수립했고 가격 변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부는 소량 계약으로 충당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가 특히 감동한 부분은 바로 한전의 친환경 발전소 조성이다. 한전은 세부발전소에 질소산화물과 황산화물 제거장치를 설치했다. 필리핀 내 환경기준이 강제한 부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친환경 기술을 대거 접목했다. 원료인 석탄 야적장은 물론 석탄이 운반되는 컨베이어벨트까지 모두 분진을 막는 지붕을 덮었다. 선진국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 역시 필리핀에서는 생소한 조치다.
한전은 세부 발전소에서 하루 1억5000만원의 순익을 내고 있다. 현지인 150명을 고용했다. 세부에서 산미구엘 맥주공장과 시멘트공장을 제외하면 고용규모 3위다. 최근엔 발전소 부지 맞은편에 필리핀 현지기업이 운영하던 화력발전소를 매입했다. 필리핀 정부는 이를 한전 발전소 수준으로 개조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 3년 후면 본격 가동된다.
이상국 세부발전소장은 "필리핀은 전기료가 한국의 두 배 수준으로 전력산업의 수익구조가 좋은데다 전력수요가 무궁무진해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며 "한국 정부와 필리핀 정부의 관계도 돈독한 만큼 한전의 추가 수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