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생존의 연대]<2-⑦>

기업과 시장은 정치보다 빠르다. 국경을 넘는 속도도 그렇다. 민간 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한일 협력이 이미 진행 중이다. 양국의 자본·기술·콘텐츠 결합으로 시너지를 낸 '성공 사례'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상징적 사례다. 한국의 무속 신앙, K팝 등이 중심 소재지만 제작은 일본 자본이 들어간 소니 픽처스가 맡았다. 사실상 한국과 일본의 DNA가 결합된 결과물이다.
흥행은 폭발적이었다. 누적 시청 수는 3억뷰를 돌파했다. 넷플릭스 영화 부문 역대 1위다. 케데헌 OST(오리지널사운드트랙) '골든'은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했다. IP(지식재산권) 가치가 1조원에 달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7월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에서도 국경을 넘은 '3국 협력의 상징'으로 케데헌이 언급됐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한일 민간 협력이 가장 역동적인 분야다.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의 확장을 이끌 핵심 영역으로 손꼽힌다. 일본 자본이 한국 아이돌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한국식 트레이닝 시스템이 일본 현지에 이식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각국의 대표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CJ ENM과 요시모토 고교가 공동 출자해 만든 일본 아이돌 기획사 '라포네 엔터테인먼트'는 이른바 'KJ팝'(K팝 시스템+일본 시장 전략)의 성공 모델로 꼽힌다.

민간 협력의 역사는 짧지 않다. 과거 한일 협력의 선도 분야는 플랫폼과 게임 산업이었다. 넥슨은 1994년 한국에서 설립됐지만 2005년 일본으로 본사를 옮겼다. 일찌감치 현지화 전략을 세웠다. 이후 메이플스토리·마비노기 등 핵심 IP를 일본 맞춤형으로 서비스하면서 장기 흥행에 성공했다. 그 결과 2011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2020년엔 일본 닛케이225 지수에도 편입됐다. 한국의 대표 게임회사가 일본 증시의 간판이 된 셈이다.
네이버가 2011년 만든 메신저 라인은 일본의 국민 메신저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IT 서비스가 일본 사회에 녹아들어 간 사례다. 이후 라인은 2021년 야후재팬과 지배구조를 통합했다. 2023년엔 사업 운영까지 통합한 '라인야후' 체제로 재편했다. 최근 일본 정부의 '지분 매각 요구' 등이 논란이 됐지만 플랫폼 산업에서 한일 협업이 이뤄졌던 선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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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엔 반도체 핵심 소재 분야에서도 협력 흐름이 감지된다. OCI홀딩스 자회사 OCI테라서스는 일본 화학기업 도쿠야마와 합작법인(OTSM)을 설립했다. 합작법인은 총 4억3500만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핵심 소재인 폴리실리콘을 생산한다. 2029년 상업 생산이 목표다.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 한일 기업이 해외 생산 인프라를 구축한 첫 사례다.
이런 흐름은 대기업 연구개발 분야에서도 확인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요코하마시에 첨단 반도체 패키징 연구개발 연구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투자금 250억엔 가운데 최대 50%는 일본 정부가 지원한다. 요코하마시에서도 보조금 25억엔을 지급한다. 정부 차원에서 삼성전자의 반도체 연구가 일본 기업의 혁신과도 연결된다고 인정한 것이다.
박성빈 아주대 일본정책연구센터장은 "삼성전자의 요코하마 연구 거점 마련은 양국의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일본의 국가전략 이익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을 시사한다"며 "반대로 일본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은 최근 한국에 대한 연구개발 기지나 생산 거점 마련을 위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