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국민배우' 안성기 l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세요?

[추모] '국민배우' 안성기 l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세요?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1.06 09:58
안성기 배우는 1957년 황혼열차로 아역 데뷔 후 2023년 노량: 죽음의 바다까지 69년간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한국 영화사의 절대적 이름이다. 투캅스의 조 형사,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살인범 장성민, 실미도의 최재현 준위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한국영화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진출처=스타뉴스DB
사진출처=스타뉴스DB

안성기라는 이름이 한국 영화사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이름인지는 누구나 안다. 1957년, ‘황혼열차’로 아역 배우로 데뷔한 이래 그의 필모그래피는 2023년 ‘노량: 죽음의 바다’로까지 이어진다. 연령대에 따라 본 작품이 겹치지 않을 수 있지만, 안성기의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사람을 찾는 건 무의미한 수고일 것이다. 한국영화의 얼굴이자 상징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국민배우’가 그였다.

내가 영화에서 처음 본 안성기는 ‘투캅스’의 조 형사다. 당시 나와 같은 80년대생 꼬꼬마들은 따스하고 부드럽기 그지없던 ‘맥심 커피 아저씨’ 안성기가 능글맞은 비리 경찰로 나타났을 때 잠시 괴리를 느꼈다. 그러나 어색함도 잠깐, 안성기와 박중훈과의 코믹 호흡은 얼마나 웃겼나. ‘투캅스’가 오래도록 형사 콤비 코미디 영화의 교과서처럼 꼽히는 건 신입 이 형사였던 박중훈뿐 아니라 관객의 마음까지 쥐었다 폈다 한 안성기의 빼어난 코믹 연기 때문이었다. 경찰학교 수석 졸업에 빛나는 이 형사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짬바’로 날아다니는 조 형사가 그 위에 날고 있는 형국이랄까. 취조실의 자해공갈 신은 그 백미 중 하나였다.

영화 '투캅스',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영화 '투캅스',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투캅스’ 이후로는 안성기를 자주 접했다. 학교에선 CA시간의 영화감상반으로, 집에선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는 것이 낙이던 때였다. ‘영원한 제국’의 정조와 ‘축제’의 이준섭과 ‘박봉곤 가출사건’의 X와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인공으로 분한 안성기를 보았다. 사극과 현대극, 코미디와 정극을 오가는 넓은 스펙트럼의 연기는 일일이 놀라기 어려울 정도였다. 알다시피 안성기의 최전성기는 80년대였고, 90년대는 박중훈과 한석규가 활약하던 때이지만 그럼에도 안성기의 명성은 여전했다. 그때 ‘영원한 제국’에 심취했던 친구는 이후로 숱한 배우가 정조 역을 맡았음에도 여전히 자신에게 정조는 안성기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나왔다. 당시 고3이었지만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범상치 않은 포스터를 보고 과감하게 ‘야자’를 째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감성이 솟구치던 10대임을 감안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전율로 몸을 떨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은 그때까지도 ‘방화’라는 표현이 공공연했던 한국영화의 고루한 이미지를 화려한 스타일로 산산조각낸 작품이었다. 액션이나 냉혹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던 안성기는 그 안에서 살인범 장성민을 연기하며 40계단 살인 사건과 그 유명한 빗속 결투 신 등으로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트렌치코트부터 노란 점프수트 우비까지 뭐든 소화해내는 패션 센스(?)에도 감탄했다. 심지어 “뭐해? 문도 안 잠그고”라는 장성민의 유일한 대사를 소소히 성대모사 할 정도로 나는 그 영화에 흠뻑 빠졌다(정작 명대사는 주인공 박중훈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다음날 담임선생님은 야자를 짼 불량학생을 엄히 취조하려 들었으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봤다는 나의 고백에 대뜸 격한 공감을 표하더니 죄를 용서해주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담임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낭만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어쩌면 그때부터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치솟았던 것 같다.

2000년대가 되어서 이전에 활약했던 배우들이 영화판에서 그전과 같은 활약을 못할 때도 안성기는 건재했다. 대한민국의 첫 천만영화이자 지금도 유명한 “날 쏘고 가라”라는 명대사를 남긴 ‘실미도’의 최재현 준위와 ‘라디오스타’의 매니저 박민수, ‘화려한 휴가’의 박흥수 사장으로 2000년대를 보냈고, 2010년에도 ‘부러진 화살’의 김경호 교수와 ‘신의 한 수’의 주님과 ‘화장’의 흔들리는 중년 남성 오정석으로 성실히 인상을 남겼다. 2020년대 ‘한산: 용의 출현’과 ‘노량: 죽음의 바다’의 어영담은 안성기의 이미지가 완벽히 오버랩되는 품격 있는 노장이었고. 성실한 연기와 발 맞춘 스캐들 없는 철저한 자기관리, 유니세프 활동 등 사회에 대한 헌신은 ‘잘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듯 했다.

고 안성기의 마지막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고 안성기의 마지막 영화 '한산: 용의 출현',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안성기의 예전 작품들도 여러 편 보았다. 어린 시절이 담긴 김기영 감독의 ‘하녀’부터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태백산맥’,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등등. 숱한 거장 감독들과 한국영화사의 날고 기는 동료 배우들이 안성기와 함께했고, 그렇게 안성기는 69년간 17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당연하게도 필모그래피엔 명작도 있고, 범작도 있고, 심지어 망작으로 불리는 작품도 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안성기의 작품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함께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철수(이성재)와 춘희(심은하)가 주인공인 영화지만, 극중 춘희가 짝사랑하는 인물이자 춘희의 시나리오 속 가상 인물로 등장하는 인공(안성기)은 남주인공 철수 이상으로 눈길이 가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80년대생인 나는 80년대의 짱짱한 주인공 안성기보단 90년대 이후 작품 전체에 도움을 주는 안성기의 롤에 익숙한 건지도 모르겠다.

쓰잘데없는 이야기로 자꾸 치대는 여자 다혜(송선미)에게 “아가씨는 꼭 공룡 같군요. 공룡은 스스로 싫증이 나야만 그만두니까요”라던 남자가, “지구란 별은 다른 별의 천국이래요”라고 시적으로 말하는 다혜에게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입니다. 스스로 빛을 못 내니까”라고 말하던 전형적인 이과형 남자가, 결국 다혜에게 감응되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툴게 자전거 타기에 도전하는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다혜가 모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수줍게 탄 모습도 기억난다. 그때의 안성기는 40대 중후반의 아저씨였지만 스무 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송선미의 짝사랑을 받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가 익히 알던 ‘맥심 커피 아저씨’가 스크린에서 생생하게 살아난 듯한 느낌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아마도 오늘 OTT에서 그의 작품을 검색할 사람이 많을 테다. 여러분은 국민배우 안성기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그 숱한 필모그래피를 살피면서 한국영화와 함께했던 자신의 추억도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라던 ‘라디오스타’의 매니저 박민수처럼, 영화라는 태양 주위를 꾸준히 돌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 빛나는 배우였던 안성기. 한국 영화사에서 절대적인 이름으로 존재했던 그 빛의 시간에 존경과 사랑을 표한다.

정수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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