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넘게 하루 6시간씩 웨이트·복싱 훈련 강행
대역 없는 리얼 맨몸 베어너클 액션 완성
"배 남산만한 100kg 살인마 제안 온다면 하고파"

정지훈과 비. 배우로서는 정지훈, 가수로서는 비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리고 그 이름들 위에는 늘 한 가지 공통된 인상이 따라붙었다. 반듯하고 성실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자기 몫을 해내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 정지훈이 데뷔 이후 처음으로 낯설고도 비릿한 얼굴을 꺼내 들었다. 그 무대는 넷플릭스 시리즈 '사냥개들' 시즌2다.
그가 연기한 '사냥개들2' 백정은 글로벌 불법 복싱 리그의 왕으로 군림하며 돈과 폭력, 질투와 열등감을 한 몸에 품은 인물이다. 시즌1이 청춘 복서 듀오 건우(우도환)와 우진(이상이)의 맨손 액션과 우정으로 사랑받았다면, 시즌2는 그 앞에 훨씬 더 크고 사나운 악을 세우는 방식으로 판을 키웠다. 정지훈은 그 중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분노에 잠식된 '폭주 기관차' 같은 빌런을 만들어냈다.
"시즌1을 처음 봤을 때가 마침 이사 하느라 아주 지쳐있던 때였어요. 넷플릭스를 틀자마자 메인에 떠 있길래 무심코 재생했는데,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볼 정도로 푹 빠져들었죠. 훗날 김주환 감독님과 미팅하게 됐을 때 운명인가 싶었고, 대본을 받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는 오케이를 외쳤어요. 감독님이 백정은 뻔한 서사나 클리셰를 가진 악역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화가 나 있는 폭주 기관차 같은 인물로 만들자고 주문하셨어요. 그래서 캐릭터를 연구하고 연기하는 데 있어서 쉽지 않았어요. 몸도 힘들었는데 마음도 힘들었죠(웃음)."

정지훈이 첫 악역 연기에 뛰어든 배경에는 캐릭터가 지닌 확고한 명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빌런 역할 제안을 받았음에도 번번이 고사했던 이유는, 오로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려고 소모되거나 자신의 이미지만을 갉아먹는 명분 없는 사악함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정은 달랐다.
"빌런을 하려면 최소한의 명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오퍼 받은 빌런은 저의 이미지를 갉아먹는 듯한, 명분 없는 사악한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었어요. 그런데 '사냥개들2'는 인물의 악함에 타당성이 있잖아요. 돈과 질투심 같은 것의 명분, 복서로서 자존심도 있었고요. 결과물도 잘 나와서 감사하고 있어요. 당연히 시즌3을 하게 되면 끝을 봐야죠."
보통의 빌런이 선한 척하다가 어느 순간 본색을 드러내는 롤러코스터형 인물이라면, 백정은 첫 등장부터 이미 화가 나 있는 사람이다. 사디스틱적인 성향과 돈이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비뚤어진 나르시시즘에 갇힌 인물. 정지훈은 이러한 캐릭터의 복잡한 열등감과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기질을 섬세하고도 폭발적인 연기로 빚어내며 시청자들을 숨죽이게 했다.
"백정이라는 인물은 서사가 없어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에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내가 최고여야 하고 돈이면 다 할 수 있고 사람 죽이는 건 일도 아닌 데다 정말 시한폭탄 같은 폭주 기관차 같은 느낌이어야 했죠. 나르시시즘에 젖어 이성을 잃어가는 백정의 심리를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인물의 본능적인 결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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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들' 시리즈의 백미인 압도적인 액션 신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기도 했다. 그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 6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과 복싱 기본기 훈련에 매진하며 인간 병기의 육체를 치밀하게 조각해 냈다. 특히 글러브 없이 맨주먹으로 부딪히는 베어너클 액션의 타격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롱테이크 앵글에서 실제로 상대의 몸을 타격하는 등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을 발휘했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 '닌자 어쌔신'을 촬영할 때가 제일 힘들긴 했어요. 거기선 무기도 많이 써야 했거든요(웃음). 그런데 '사냥개들2'는 또 다른 의미로 쉽지 않았어요. 몸도 힘들었지만, 악역이다 보니 캐릭터의 감정선을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해서 마음적으로도 꽤 힘들었거든요. 게다가 맨몸 액션이라 타격감과 생동감을 살리려면 몸을 더 직접적으로 써야 했어요. 상대역과 실제 링 위에서 경기를 치르는 복서들처럼 치열하게 눈치 싸움을 벌여야 했죠. 리허설도 토 나올 때까지 정말 많이 했고요. 대역은 없었어요. 직접 하지 않으면 생동감이 안 살잖아요."
특히 그는 동료 배우와 스턴트팀 모두가 극한의 시간을 견뎌냈다며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했다. 함께한 동료 배우들뿐 아니라 수많은 스턴트맨들에게도 감사하다. 뼈가 곯았을 거다. 한 걸 또 하고 또 했으니까. 모두가 하루 10시간 동안 리허설과 촬영을 반복하며 정말 몸과 마음 모두 고생했다"고 돌아봤다.

작품의 좋은 성과와 첫 악역 연기에 대한 호평 앞에서도 정지훈은 들뜨기보다 차분했다. 배우라는 직업이란 결국 결과로 판단 받고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대신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를 뒀고, 결과보다 과정 앞에서 스스로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배우라는 직업은 결국 검증받고 평가받는 일이잖아요.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데 제 선택을 후회하거나 반성한 적은 없어요. 저는 그걸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이 작품을 보고 정말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고, 취향에 따라 다르게 보시는 분들도 있을 테니까요. 저는 그저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어요. 원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결과로 판단 받는 직업이다 보니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한 것 같아요."
'사냥개들2'를 통해 생애 첫 악역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정지훈은 향후 또 다른 빌런 연기를 향한 가능성도 활짝 열어뒀다. 그는 "물론 좋은 작품이 있다면 기꺼이 또 빌런에 도전할 거다. 만약 누군가가 100kg 정도로 살을 찌워야 하는 살인마 역할을 제안해 준다면 해보고 싶다. 배가 남산만 하게 나온 나태한 살인마도 좋다. 기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입어보고 싶다. 몸 좋고 성실한 역할은 이미 충분히 많이 해봤으니까 새로운 인물에 대한 욕심이 크다"고 말하며 앞으로 행보에 기대감을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