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 든 제주 4.3 사건 다룬 첫 상업 영화
'내 이름은' 주연 염혜란 "이름으로 얽힌 서사 풀어간 점이 무척 좋아"
"내 이름도 여러 이름으로 많이 불려지길 바라"

배우 염혜란은 늘 단단한 얼굴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서 왔다. 그러나 영화 '내 이름은'에서 그가 연기한 정순은 단단함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제주 4·3의 생존자이면서, 오랜 세월 묻어둔 기억의 파편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자, 아들과 친구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어머니다. 1998년과 1949년을 오가며 제주의 상처를 되짚는 이 작품에서 염혜란은, 비극을 앞세워 외치기보다 오래 잠겨 있던 침묵과 그 안의 흔들림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그전에는 제주도가 마냥 아름답고, 우리나라에 이렇게 예쁜 곳이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그런데 촬영하면서 곳곳에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예전에는 제주에 오면 그저 사진 찍기 바빴다면, 지금은 저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제주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져요."
'내 이름은'(감독 정지영)은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싶어 하는 18세 소년 영옥과, 까맣게 잊혀 있던 1949년 제주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어머니 정순의 궤적을 그린다. 상업영화로 제주 4·3 사건을 전면에 놓은 첫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다만 염혜란이 이 작품에 끌린 이유는 소재의 무게보다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에 있었다. 목적의식이 앞서는 작품이 아니라 이름이라는 상징을 통해 인간의 상처와 시간을 더 서정적으로 응시하는 결이 그를 움직였다.
"이 영화를 하는 데 있어서 부담스럽진 않았어요. 제가 우려하는 건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 너무 목적성을 전면에 드러낼 때예요. 자칫 기록으로만 보일 수 있겠다는 걱정이 있거든요. 그런데 '내 이름은'은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지금보다도 더 서정적이고 문학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특히 이름으로 얽힌 서사로 풀어간다는 점이 무척 좋았어요."

정지영 감독과의 작업 역시 그 결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염혜란이 말하는 현장의 핵심은 대화였다. 누구 한쪽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인물들, 피해와 가해가 단선적으로 나뉘지 않는 구조, 그리고 이야기가 과거의 비극을 재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의 상처까지 돌아보게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현장에서 끊임없이 오갔다. 정순은 그런 과정을 통해 피해자라는 한 단어로 묶이지 않는 인물로 완성됐다.
"감독님은 대화를 정말 많이 하는 분이에요.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그 이야기가 마음이 움직이면 인정하고 고치겠다는 태도가 깔려 있죠. 저도 정순이 한쪽 편에 서는 인물로 읽히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정순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해요. 또 거둬 키워 준 아버지가 은인이면서 원수이기도 하죠. 그런 중첩된 레이어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품의 미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염혜란이 붙든 정순의 핵심은 비극이 아니라 생활감이었다. 그는 정순을 처음부터 희생자 이미지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일하고, 아들과 큰 세대 차이에도 친구처럼 지내며, 홀어머니라고 해서 오직 모성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살결이 입혀져야 비로소 정순이라는 인물이 살아난다고 봤다. 이 접근은 염혜란이 그동안 맡아온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또 다른 방향으로 미세하게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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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은 처음부터 피해자나 희생자로만 보이는 이미지에 가두고 싶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일을 하고 있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아들과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사람이죠. 홀어머니지만 아들에게만 올인하는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쿨한 어른의 면도 있고요. 그런 식으로 살을 입혀서 치우쳐지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어요."

염혜란은 이처럼 복합적인 내면을 지닌 인물을 무조건적인 동정의 대상으로 그리기보다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현실적인 어른으로 입체화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감독님이 제주 4·3은 제주에서 한 집 건너 한 집의 이야기라 누구의 편만 들어 서사를 펼쳐내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고 하셨어요. 저 역시 정순이 평면적인 한쪽 이미지에 갇히는 것은 가장 피하고 싶었죠. 그래서 제주의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을 함께 지닌 인물로 살을 입혀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증언집을 볼 때도 당시를 겪으신 분들이 마냥 트라우마 속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물질하며 삶을 일궈내고 집도 여러 채 마련하며 각자의 시간을 살아냈다는 점이 크게 다가왔어요. 삶을 견디고 살아낸 사람들의 결이 정순 안에도 담기길 바랐죠."
영화의 백미는 단연 정순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일렁이는 보리밭에서 추는 한국무용 살풀이 장면이다.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이 경건한 춤사위를 위해 염혜란은 연극 무대 시절 익혔던 무용을 다시 익히고 배웠다. 거센 바람이 부는 제주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해가 지는 타이밍 속에서 완성된 이 시퀀스는 짙은 감명을 선사한다.
"감독님이 정서가 가는 대로 추라고 하셨는데, 느낌대로 잘 추는 게 사실 제일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그 말씀이 뭔지 알 것 같았어요. 한국무용에는 아름다움도 있지만 한이 있어요. 느린 가락에서 오는 모션이 이 작품과 닮아 있다고 느꼈죠. 촬영하면서는 보리밭 자체가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왔어요. 너무 찬란하고 눈부신데, 너무 슬픈 역사를 갖고 있으니까."

보리밭 신은 염혜란에게 가장 깊은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킨 장면이기도 했다. 사전 답사 때부터 많이 울었다고. 다만 정지영 감독의 디렉팅은 역설적으로 감정을 전면에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슬퍼 보여야 한다는 의식으로 연기하는 순간 오히려 진실에서 멀어진다는 것. 말할 수 없었던 이름, 눈앞에서 죽어가는 친구,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당시를 살아내는 방식으로 정순에게 다가갔다.
"사전 답사를 위해 보리밭에 갔을 때는 그 참혹한 과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벅차올라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감독님은 정서로 연기하지 말라고 하셨죠. 이 장면이 슬플 거라고 미리 생각한 채 연기하면 안 되고, 눈앞에서 친구가 죽어가는데도 이름조차 부르지 못했던 그 상황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고요. 관객은 그 장면을 보며 정서를 느끼지만, 연기하는 배우는 그 순간을 살아내야 진짜가 되니까요."
'내 이름은'이 더 특별한 이유는 제작 과정에 있다. 이 작품은 9,778명의 시민과 도민 후원으로 제작 기반을 다진 영화다. 제작 기간이 길어지고 촬영이 연기되는 시련도 있었지만, 십시일반 뜻을 모은 사람들의 참여는 독립영화의 숭고한 정신과 상업영화의 대중성을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1만여 명에 가까운 시민 후원자들의 이름이 장장 5분 동안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웅장하게 올라간다. 염혜란은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하기 바빴던 평소의 습관을 내려놓고, 이 연대의 결과물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는 이름들을 보는데 그분들이 한 명 한 명 자기 이름을 들고 '저 여기 있습니다', '저도 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면서 일어서는 그림이 그려졌어요. 많은 군중이 하나씩 일어나는 느낌이어서 벅찼죠. 그래서 덜 외롭다는 감정도 들었어요. 함께라는 마음이요. 공개된 뒤에도 많은 분들이 꼭 보겠다고 응원해 주셔서 '아 이 이야기가 정말 필요했구나' 싶었어요."

염혜란에게 '내 이름은'은 묵직한 시대극 한 편으로만 남지 않을 듯하다. 정지영 감독과 치열하게 만나고, 역사적 비극을 단순한 프레임으로 가두지 않는 법을 다시 확인한 작품, 그리고 배우 자신의 이름 또한 하나로 규정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든 작품이다. 누군가에겐 염혜란, 누군가에겐 극 중 인물의 이름으로 남겠지만, 그 다양한 호명이야말로 배우가 가장 오래 바라온 일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이 말하는 것은 결국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는 일이고, 염혜란은 그 회복의 시간을 자신의 얼굴과 몸으로 증명해 냈다.
"저는 '내 이름을'을 통해서 이 이야기가 더 많이 불리고, 자유롭게 꺼내질 수 있는 단초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주 4·3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도 계속돼야 하는 평화의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하고요. 제 필모그래피에서는 정지영 감독님과 치열하게 만난 작품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염혜란이라는 이름도 하나로만 불리기보다 많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은'은 전국 극장에서 절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