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무싸'서 구교환·오정세 중심 붙드는 존재감
분노·연민·현실 오가는 캐릭터에 불어넣은 생동의 숨결

세상살이의 척박함을 견디기 위해 인간은 저마다 기댈 곳을 찾는다. JTBC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의 고혜진(강말금)에겐 영화판과 바(Bar) 아지트가 안식처다.
과거 기자 시절, 남의 비극을 캐내야 하는 야만을 견디다 못한 혜진은 다짐했다. "아이 잃은 부모도 웃게 할, 겁나 재밌는 걸 하겠다"고. 하지만 고박필름을 꾸려가며 마주한 영화판과 절친 모임 8인회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타인의 불행을 파먹는 야만을 피해 도망쳤더니, 이번엔 나이만 먹고 허세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어른 아이들의 칭얼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고단한 보호자가 됐다.
혜진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뼈아픈 통찰을 지닌 인물이다. 고되게 일한 뒤 아지트에 앉아 '여유롭고 관대한 인간'이고 싶었던 소박한 갈망. 그러나 20년째 입으로만 영화를 찍는 황동만(구교환)과 남편 박경세(오정세)의 다툼이 늘 평온을 깬다. 남을 깎아내려 자존감을 채우는 동만의 패악질, 그에 파르르 떠는 남편의 자격지심. 이 지긋지긋한 소음은 혜진을 우아한 제작자에서 악다구니만 남은 피곤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결국 혜진은 동만을 아지트 밖으로 내친다. 하지만 동만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단박에 출입 금지를 푼다. 누군가와 온전히 관계 맺고 제 몫을 하는 인간이 되길 바랐던, 투박하지만 속 깊은 애정이다.

남편 경세는 지질함의 극치다. 혜진 역시 이혼을 수없이 떠올린다. 하지만 끝내 경세를 버리지 못한다. 아니, 존경한다. 경세는 조롱받고 무너져도 기어이 다시 펜을 쥐고 링에 오르기 때문이다. 혜진은 깨질지언정 현실과 부딪히는 그 처절한 맷집을 사랑하고 연민한다.
거대 자본을 앞세워 남의 영화를 탐내는 최동현(최원영) 대표 앞에서도 타협은 없다. 과거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지시를 내렸던 데스크를 닮은 그를 향해 혜진은 일갈한다. "저 재밌게 살랍니다. 구린 대표님하고 손절하고. 혼자 다 드세요"라며 "배 터지시라"는 살벌한 덕담(?)까지 시원하게 던진다. 자본의 유혹 앞에서도 영화의 본질과 소신을 지키는 단단한 심지다.
그리고 혜진은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동만을 구원한다. 끝없이 남을 씹어대는 동만의 입을 다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차가운 현실의 링 위로 멱살 잡아 끌어올리는 것뿐임을 혜진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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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순위였던 동만의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드립니다'를 전격 제작하겠다는 혜진의 선전포고는 소름 돋는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내가 몇십억을 꼬라박든 저 새끼 참교육시킨다. 링 위에 올라가서 한 번 얻어터져 봐. 못 도망가." 이 서늘한 경고는 실은 동만을 늪에서 건져 올리려는 혜진만의 과격하고도 다정한 참교육이다.

껍데기 속에 숨은 동만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기어이 피 흘리게 만드는 것. 이는 타인의 방황을 방관하지 않고 자신의 자본과 인내를 갈아 넣어 한 인간을 빚어내려는 거룩한 결단이다. '모자무싸'의 세계에서 혜진은 기꺼이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철없는 이들을 깨우치는 시리게 찬란한 어른이다.
그렇기에 혜진은 배우의 밀도 없이는 완성되기 어려운 인물이다. 분노와 연민, 냉정함과 애정을 한 몸에 품은 이 복합적인 얼굴은 강말금의 연기를 만나 완벽한 형태를 얻는다. 그의 묵직한 내공은 이 복잡한 캐릭터에 완벽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씩씩한 찬실이부터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나쁜엄마' 등에서 보여준 속정 깊은 생활 연기는 혜진 안에서 화려하게 만개한다.
현실에 두 발을 굳게 딛고 선 듯한 단단함, 뼈 때리는 독설과 애틋한 연민을 오가는 섬세한 호흡. 자칫 두 철없는 남자의 서사 속 평면적 조력자로 남을 뻔했던 캐릭터는, 강말금의 짙은 눈빛을 거치며 극의 중심을 쥐고 흔드는 입체적인 '진짜 어른'으로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