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를 타선 없는 5월 걸그룹들의 '기세' [K-POP 리포트]

거를 타선 없는 5월 걸그룹들의 '기세' [K-POP 리포트]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6.05.25 09:20
5월에 케이팝 4, 5세대 걸그룹들이 약속처럼 풍요로운 성장형 음악을 발표했다. 베이비몬스터, 엔믹스, 빌리, 에스파, 있지의 앨범과 싱글은 모두 빼어나며, 각 그룹의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주었다. 타이틀곡 외에도 양질의 수록곡들이 많아 앨범 전체의 퀄리티를 높였고, 걸그룹들이 다루는 주제 또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스파(왼쪽 위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베이비  몬스터 빌리 있지 엔멕스. 사진제공]=각 소속사 
에스파(왼쪽 위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베이비  몬스터 빌리 있지 엔멕스. 사진제공]=각 소속사 

봄과 여름이 공존하는 5월.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 성장과 풍요의 시기에 케이팝 걸그룹들이 약속이나 한 듯 풍요로운 성장형 음악을 발표했다. 중요한 건 이들이 모두 4, 5세대 팀이라는 것. 케이팝의 현재와 미래를 부분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으리란 얘기다. 그 옛날 이정현의 ‘와’를 닮은 ‘It’s Me’로 도파민 넘치게 컴백 한 아일릿의 4월을 지나 무지갯빛 5월을 함께 짊어질 걸그룹의 신작들을 한자리에서 들어보았다.

베이비몬스터,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베이비몬스터,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이비몬스터, 엔믹스, 빌리, 에스파, 있지의 앨범·싱글은 하나같이 빼어나다. 거를 타선 없이 죄다 기세등등하다. 이미 차고 넘치는 시장처럼 보여도 이들 음악을 듣고 어떤 게 누구의 곡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건 결국 이 집단 컴백이 오리지널리티 대결의 장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가령 ‘댄스’의 우리말을 앨범 제목으로 내건 베이비몬스터의 ‘춤 (CHOOM)’이 톤과 정확성에서 압도적인 아사의 랩 스킬을 앞세워 레이블(YG)의 색깔까지 담보한다면, JYP의 엔믹스는 곡을 정점으로 데려가는 릴리의 가창력을 강조하며 ‘Blue Valentine’의 성공이 가르쳐준 코러스 멜로디의 중요성을 거듭 새기는 모양새다. 레이블이 잘하는 걸 하는 이 분위기는 그대로 그룹들 개성 표출의 기회가 되면서 각자 다져온 팀 색깔을 더욱 살찌운다.

엔믹스,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엔믹스,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다만 그런 건 있다. ‘타이틀곡’이라는 관습적 설계가 곡들 사이 경계로 둔갑해 나머지 양질의 노래들이 ‘그 외’로 소외되는 모습은 여전히 아쉬운 것이다. 지난 앨범에서 타이틀곡을 빼고도 훌륭한 음악을 들려준 엔믹스의 경우, 저들은 이번에도 ‘Heavy Serenade’보다 더 주목할 만한 ‘IDESERVEIT’을 가진 작품으로 돌아왔다. 투애니원과 블랙핑크의 유산을 훌륭하게 지켜내고 있는 베이비몬스터 역시 ‘춤 (CHOOM)’으로 내딛기 전 첫 곡 ‘MOON’으로 신작의 저렴하지 않은 퀄리티를 누설하고 있으며, 있지와 빌리 역시 탁월한 ‘Motto’와 ‘WORK’라는 타이틀곡을 둘러싼 양질의 곡들로 특정 지점이 아닌 작품 전체를 빛내고 있다. 앨범 단위로 음악을 발표할 땐 자칫 색안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타이틀곡’이라는 타이틀을 지워보는 건 어떨까.

항간에는 케이팝 걸그룹들이 다루는 주제가 천편일률처럼 되어간다는 지적도 보인다. 대략 정리하면 주체성 또는 당당함, 자존감과 자신감, 돌파, 그리고 사랑과 위로의 정서다. 이번 다섯 팀의 가사에서도 저 공식 아닌 공식은 유효하되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실을 즐기지 못하는 20대의 감정을 노래한 빌리의 ‘B’yond Me’나, 완벽한 논리를 가진 AI가 사랑이라는 비논리적인 감정과 마주하며 느끼는 혼란을 그렸다는 있지의 ‘you And I’는 아직 걸그룹이 건드릴 수 있는 주제들이 더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있지,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있지, 사진제공=JYP엔터테인먼트

말이 나온 김에 있지의 신작을 칭찬하고 싶다.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아직 최고 자리에 올라보지 못한 그들의 이번 앨범은 마침내 그 최고가 자신들의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들려준다. 한마디로 있지의 신보 ‘Motto’에선 스킵 없이 앨범을 끝까지 듣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이건 사실 그룹의 오리지널리티를 갖추겠다는 마음가짐만큼이나 중요한 목적의식이다. 밝고 따뜻한 또는 조금씩 더워지는 5월의 느낌을 철저히 따르는 재킷 사진에서부터 그 속에 담긴 음악까지, 있지는 이번에 회색지대의 진지함보단 파스텔 톤의 발랄함을 선택했다. 자극을 줄이고 친근함에 방점을 찍는다. 그 발랄함과 친근함의 정점인 첫 트랙 ‘Motto’도 물론 좋지만 시크한 류진의 ‘LOOK’을 중심으로 한 솔로 곡들도 모난 데 없이 빼어나다. 혹자가 지적했듯 있지의 12번째 미니앨범에선 그래서 “코앞으로 다가온 여름을 장악하겠다는 포부”마저 감지된다.

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에스파,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한편 있지와 달리 신곡 ‘WDA(Whole Different Animal)’에서 에스파는 계절의 변화에 무심하다. 아날로그 힙합 비트와 디지털 신스 텍스처의 뒤척임 속에서 이들은 여전히 차갑고 매섭다. 제목처럼 자신들은 다르다(Different)는 걸까. 이달 말에 나올 2집의 맛보기 싱글임에도 거기에선 확신과 자신감이 흘러넘친다. 언뜻 곡 전반을 불안하게 짓누르는 ‘WDA’의 신스 루프는 90년대 록 밴드 너바나의 ‘Big Cheese’ 메인 기타 리프를 닮기도 했는데 이는 주인을 배려하면서도 손님으로만 머물진 않겠다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지드래곤보단 먼 이름이지만, 빌리가 ‘$ECRET no more’에서 데려온 차이코프스키보단 한참 가까운 클래식·레트로 요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뉴진스가 없는 곳에서도 시대를 주무르려는 시도는 걸그룹계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번 작품들 중엔 스케일이 남다른 설정도 보인다. 특히 빌리의 앨범이 그렇다. ‘Crescendo’로 문을 여는 엔믹스의 것에도 물론 뮤지컬풍 서사가 있지만, 빌리의 ‘the collective soul and unconscious: chapter two’는 긴 제목만큼이나 긴 앨범 설명을 풀어내면서 그 ‘서사’의 끝을 들려준다. 정말이지 빌리의 앨범 설명은 역대급으로 수다스럽다. 곡의 속도(BPM)부터 이식한 장르와 제작 방향, 작업 배경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는 이들의 음악 해설은 마치 듣고 보는 사람들의 해석과 상상을 사전에 차단이라도 하려는 듯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특히 필요 이상으로 남용된 장르 용어, 장비 용어는 마치 수록곡들을 AI에게 들려주고 AI가 써낸 감상문처럼 느껴질 정도인데, 문제는 그 문장들이 과거 구설수에 올랐던 ‘보그체’에 버금갈 만큼 어색하다는 것이다. 기획사 측도 그걸 뒤늦게 느꼈는지 지난 며칠 사이 뚱뚱했던 앨범 설명은 나름의 ‘퇴고’로 다이어트를 거친 상태다.

빌리,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빌리, 사진제공=미스틱엔터테인먼트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누가 들어도 ‘Whiplash’(에스파)의 카리스마를 닮은 빌리의 ‘WORK’는 강력하다. 여기엔 미주알고주알 주석 없이도 듣는 이들은 즉각 반응할 수 있다. 또한 음악에서나 가사에서나 ‘OFF-AIR’ 같은 곡을 들으며 해방감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다. 빌리의 소속사 미스틱스토리는 앨범의 ‘스토리’를 더 줄였어야만 했다. 작가 조지 오웰의 말처럼 “소설 자체로 말할 수 없다면 그 작품은 실패한 작품”이다. 빌리의 앨범은 음악 자체로 충분히 말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이번 5월의 ‘걸그룹 대전’은 수직적 우열의 관점보단 수평의 감상 영역에서 해소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누구나 부담 없이 그 음악에 접근해 보면 계절만 피어나는 것이 아닌, 케이팝 걸그룹의 건강한 미래도 함께 피어나는 장관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엔믹스의 ‘Heavy Serenade’ 뮤직비디오가 그것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면, 저 다섯 팀의 각양각색 음악은 청각적으로 그걸 함께 구축했다.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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