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선임조사역 A씨. 30대 후반인 그는 입사 10년차다. 남들은 '좋은' 직장을 넘어 신의 직장으로 불렀다. 겉으론 '모르고 하는 소리'라 했지만 내심 자부심도 컸다. 어찌보면 그 자존심, 자부심으로 10년을 버텨왔다.
하지만 이젠 '글쎄요'란다. 저축은행 비리가 불거졌을 때도 이렇게 힘이 빠지지는 않았단다. 그러면서 두툼한 문건 하나를 펼친다. 형광펜으로 줄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그의 기운을 빼고 있는 존재는 바로 재산등록 매뉴얼. 재산등록 대상이 금감원 2급에서 4급으로 확대되면서 그도 재산등록 대상이 됐다. 나이 기준으로 보면 50세에서 30대 초중반으로 낮춰졌다.
이제 갓 4급이 된 30대 초반 직원들은 "재산이라 할 것도 없는데…"라며 푸념을 한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30대 월급쟁이의 '재산' 수준은 뻔하다. 30대 후반의 기혼자들은 "재산 신고가 아니라 부채 신고를 해야 한다"고 볼멘소리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참을 만 하단다. 어차피 할 것, 하면 된다. 문제는 가족이다. 배우자와 직계 가족도 재산 등록 대상자이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해야 한다. 배우자에겐 그나마 말을 꺼내기 쉽다. 혹여 숨겨놓은 비상금이라도 있을까 기대(?)도 한다.
헌데 부모님은 좀 다르다. "아버지, 재산 얼마 있어요?" "집값은 얼마에요?" "보험은 몇 개 있어요?"라고 물을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자식 직장 생활 때문이라지만 이해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전화로 풀 문제가 아니기에 휴일에 짬을 내 고향을 찾는 이도 있다. '사내 커플'들은 양가 부모 재산이 모두 파악될 수도 있다.
금감원 고위 인사는 "고위직이 돼 재산 공개를 할 때 부모님의 양해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돌이켰다.
물론 고지 거부를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재직증명서나 사업자 등록증 등 온갖 서류를 내야 한다. 금감원에 자식 하나 보냈다가 부모도 고생해야 할 판이다.
자업자득이란 지적도 있지만 분위기에 편승해 신중치 못하게 접근한 측면도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5월 금감원을 찾아 질타한 이후 나온 혁신 해법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