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부동자금 1000조원, 현금의 양극화

돈이 시장에 돌지 않고 금융기관에 묶여 있는 '돈맥경화' 조짐이 뚜렷하다. 지난해 두 차례 기준금리를 내린 한국은행이 코로나19(COVID-19)로 추가 빅컷(Big Cut·큰 폭의 금리인하)에 나서는 등 정부가 돈 풀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늘리기보다는 지출을 줄이고 '현금쌓기'에 주력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코로나19 이후 '과잉 유동성'에 따른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23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기준 부동자금 규모는 1098조3069억원으로 집계됐다. 부동자금은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 저축성 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현금성 자산을 합친 것이다. 지난해 말(1045조5064억원) 이후 두 달 새 50조원 넘게 부동자금이 늘었다.
시중은행 기업금융 담당 임원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특정 업종의 기업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 기업들은 당장 유동성을 걱정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라며 "기업들이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자 지갑을 닫고 장기적 리스크에 대응하는 채비를 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한·KB국민·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3월 말 대기업 정기예금 잔액은 165조2917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달보다 2조6967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조8295억원 늘었다.
돈맥경화 현상은 여러 지표에서도 감지된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통화승수(M2·평잔/본원통화)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1월 15.27배, 2월 15.4배로 2001년 12월 통계 집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우리나라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을 총통화(M2·평잔)로 나눠 구한 통화유통속도 역시 지난해 0.68로 통화량 집계를 시작한 2002년 이후 가장 낮았다.

지난 2월말 국내은행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17.1회까지 떨어졌다. 2019년 말(20.3회)보다 3.2회 하락한 것으로 최근 1년 새 가장 낮은 수치다. 예금회전율은 시중에서 돈이 얼마나 활발하게 돌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기업이나 개인이 은행에 맡겨둔 돈을 얼마나 자주 인출해서 사용하는지에 대한 빈도수를 계산한 것이다. 예금회전율이 낮으면 시중자금이 소비와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은행에 묶여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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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초저금리가 지속되면서 시중에 돈이 대거 풀렸지만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인해 소비와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진단한다. 경기 둔화와 부동산 규제 강화, 금융시장 불안 등에 따라 투자 심리가 얼어붙은 탓이다.
반면 정작 필요한 곳에는 돈이 가지 않는다. 정부가 한시적으로 은행의 외화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을 80%에서 70%로, 통합 LCR은 100%에서 85%로 내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내년 6월까지 5%p(포인트) 내의 예대율 위반에 대해서는 제재를 면제키로 하는 등 은행들의 대출 여력에 숨통을 틔워줬다.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해 시장에 돈이 돌도록 하기 위한 조치지만 은행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과 중소기업들에 별도의 정책금융을 통해 자금지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의 대출 확대가 자칫 부실 대출이나 과잉 공급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한 금융지주사 고위 관계자는 "은행 돈은 고객들이 은행을 믿고 맡긴 돈"이라며 "마구잡이로 늘렸다간 자칫 고객들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대출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른 은행 관계자는 "소상공인 대출을 받으러 창구에 온 소상공인들 중에는 대출받은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진짜 어려운 사람들한테 자금이 공급되는지가 중요한데, 정부가 속도만을 강조하다 후유증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은 '과잉 유동성'이 코로나19 이후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시장의 거품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경고한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과할 정도의 유동성을 시장에 풀다 보니 코로나19 국면이 끝나면 그 돈이 자산시장에만 돌아다니게 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며 "인플레이션(물가 지속상승) 우려도 높아지는 만큼 적재적소에 유동성을 공급하면서도 과잉 공급이 되지 않도록 유동성 콘트롤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