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무슨일이?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과거 오늘, 우리 사회와 세계에서 일어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 문화, 정치적 변화를 되짚어봅니다. 잊혀진 이야기부터 잘 알려진 순간까지, 오늘의 역사가 전하는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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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2월25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 주민들은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마을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던 한국군들은 주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빵을 또 얻을 수 있겠지'하는 생각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군이 모이라는 장소에 간 하미 마을 주민들의 예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로 전개됐다.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한국군들은 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를 동원해 모인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총성과 폭발음이 2시간여 이어졌고 주민 135명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부대가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하미 마을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문제는 젊은 남자들이 마을을 비웠던 상황에서 숨진 주민들이 대부분 아이들과 여성, 노인이었다는 것. 당시 하미 마을은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마을로 분류됐기에 주민들도 미군과 한국군에 대해선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학살이 벌어질 당시 숨어있다가 살아남은
379년 전인 1637년 오늘(2월 24일),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티다 청에 항복했다. 왕족들이 대피한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청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청은 성에서 내려온 인조에게 항복 의식으로 '함벽여츤'을 치를 것을 요구했다. 망자처럼 두 손을 묶고 입에 구슬을 문 뒤 빈 관을 메고 항복하라는 것이었다. 최명길, 김신국 등이 타협에 나서 항복의례는 함벽여츤이 아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이날 진시(辰時·오전 7~9시) 남색 융의(戎衣·무관복) 차림으로 남한산성을 나선 인조는 현재 송파구 석촌호수 부근인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삼전도에 이르자 청 장수 잉굴다이(龍骨大)가 인조 일행을 청 황제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愛新覺羅皇太極)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인조는 먼저 홍타이지와
일본과 러시아가 만주와 조선에서의 세력 다툼이 한창이던 1904년. 조만간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대한제국은 그해 1월23일 양국의 전쟁 기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대한제국을 우군으로 만들어놓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한·일간 협약 체결을 요구했다. 2월10일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10년 전 치렀던 청·일전쟁보다 길어진 병참선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한제국 내 친러·중립파를 제거하기 위해 2만명의 군대를 한성(현 서울)에 주둔시켰다. 사실상 일본군이 한성을 점령한 상태에서 일본 공사 하야시는 대한제국에 공수동맹(공동 공격·방어) 협약 체결을 강요했다. 대외 중립 유지가 어려움을 인식한 대한제국은 어쩔 수 없이 112년 전 오늘(2월 23일) 외부대신 이지용을 내세워 하야시와 양국 간 협약인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미 이지용은 일본정부에게 1만엔을 받고 매수당한 상태였다. 이 의정서를
1905년 2월 22일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독도를 다케시마(죽도)로 명명하고 일본의 시마네 현으로 편입한다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100년,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여전했다. 2005년 3월16일 조용한 시골 도시인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가 들썩였다. 이날 오전 11시30분 시마네현 의회가 본회의 표결을 통해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안이 통과됐기 때문이다. 기립 표결 결과 의장을 제외한 출석의원 36명 중 찬성 33명, 반대 2명, 기권 1명 등 찬성표가 압도적이었다. 총 3조로 구성돼 있는 '다케시마의 날' 제정 조례는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1조는 독도의 영토권 조기 확립을 목표로 운동을 추진하고 독도 문제에 대한 국민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다케시마의 날을 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2조는 다케시마의 날을 2월22일로 한다, 3조는 시마네 현은 '다케시마의 날'의 취지에 맞는 대책을 추진해 나간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로써 매년 2월22일은 '다
“중국을 공산당에게 빼앗긴 트루먼 정부의 실책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정치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40년대 당시 누구보다 공산세력을 비난하고 적대시했다. 혹자는 그를 ‘냉전의 투사’로 부르기도 했다. 1972년 2월21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는 대통령 재임 3년차에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후 국교가 단절된지 23년만이었다.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은 당초 생각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예정에도 없던 마오쩌둥 주석을 극비리에 만나 가장 골칫거리였던 베트남 전쟁의 중공군 파견 계획 철회 의사를 확인했다. 당시 닉슨의 중국 방문에 동행했던 헨리 키신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오쩌둥 주석은 닉슨 대통령에게 “두 나라는 전쟁상황이 아니다. 미국 군대는 베트남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고 중국 군대는 해외로 나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병 의사가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는 항상 꼿꼿이 얼굴을 세우고 세수를 했다. 물을 손에 찍어 얼굴에 묻히니 소매며 바지 밑단을 물에 적시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소설가 이광수가 단원 신채호 선생을 묘사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화려한 이론이 아닌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당대 최고의 역사이론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오늘(2월21일)은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기다. 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동소리를 줄곧 들었던 그는 1905년 25살의 나이에 성균관대 박사가 됐다. 그는 당시 을사조약을 맺는 등 조선의 정국이 혼란스럽게 흘러가자 관직을 포기했다. 이후 신채호 선생은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도 채 안돼 황성신문 사장인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것으로 계기로 신문 출간이 정지된다. 신채호 선생은 영국인 베델이 사주인 대한매일신보에서
48년 전인 1968년 오늘(2월20일) 전 일본 열도를 충격에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 위치한 클럽 밍크스. 야쿠자가 한 재일교포에게 빌려쓴 돈을 갚으라며 협박한 뒤 “조센징, 더러운 돼지XX”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서 온갖 차별과 모멸을 받아온 그는 이 한 마디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곧바로 소지했던 엽총으로 야쿠자 두목과 그 부하를 겨누어 사살했다. 당시 41세의 이 재일교포 남성은 ‘김희로’다. 2명을 사살한 그는 현장에서 45㎞ 떨어진 시즈오카현 스마타쿄 후지노미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여관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인질극과 그가 주장한 재일교포 차별문제는 TV와 신문을 통해 일본 전역에 생생하게 전달됐다. 그동안 일본에서 쉬쉬하던 재일교포의 인권과 차별문제가 수면 위로 본격 부각되는 계기가 된 것. 인질극을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는 김 씨에게 한복 한 벌을 건네준 뒤 “일본인에게 붙잡
'나의 각막은 기증하고 유체는 의학연구에 사용되도록 해부하며 골회는 남기지 말고 대해에 뿌려달라'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남긴 유언이다. 19년 전 오늘(2월19일) 사망한 그의 뜻에 따라 유족들은 그의 골회를 꽃잎과 함께 홍콩 앞바다에 뿌렸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흑묘백묘론)'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다' '과학기술은 제일의 생산력이다' 등 다양한 이론과 실사구시에 기반을 둔 전략을 만들어 중국의 개혁·개방을 총설계하고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의 과감한 개혁조치로 중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덩샤오핑 사망 당시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중국인민들의 오늘날과 같은 문명화된 신생활과 사회주의 현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말로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1904년 8월22일 청나라 쓰촨성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1920년부터 1924년까지 프랑스에서 유
내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다. 1517년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1483~1546)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아버지' 루터는 470년 전 오늘 영면에 들었다. 루터가 원래부터 성직자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1483년 10월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인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전환점이 된 시기는 22세 여름이었다. 길을 걷던 젊은 루터의 눈앞에 벼락이 내리 꽂혔다. 벼락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인 루터는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외쳤다. 이후 법률 공부를 포기하고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에 들어가 신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중세 교회와 로마 교황은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교황청은 돈을 받고 죄를 사하여 주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모았으며 성직은 세습되거나 매매되기도 했다. 루
'아침에 화내고 나와서 미안해. 진심이 아니었어. 자기야 사랑해. 영원히.' '열차에 불이 났는데 문이 안 열려요. 숨을 못 쉬겠어요'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커야 해. 아빠가 미안해.' 13년 전 오늘(2월18일)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순간 희생자들이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가족들에게 남긴 작별의 말이다. 이날 오전 9시52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정차한 지하철 객차 안에서 정신지체장애인 김대한이 특별한 이유없이 휘발유가 든 자동차 세척용 샴푸통에 불을 붙였다. 김대한은 자신의 옷에 불이 붙자 황급하게 가방을 객실 바닥에 던졌고 불길은 순식간에 객실내로 번지면서 화재가 확산됐다. 192명이 숨지고 148명이 부상해 지하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대구지하철참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 전동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대부분 빠져나갔다. 문제는 맞은 편에서 역으로 도착한 다른 전동차에 불이 순식간에 옮겨붙은 것. 불이 옮겨붙자 당황한 기관사는 마스터키를 뽑은 채 대피했고 불
2년 전 오늘(2월 17일) 오후 8시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코오롱 마우나오션리조트. 이 리조트 체육관에선 1000여명의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외국어대학교 총학생회가 주최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열리고 있었다. 1시간 뒤, 게임이 진행되던 가운데 무대 뒤편 지붕에서 '쩍쩍' 소리가 나면서 순식간에 체육관 지붕이 V자 형태로 무너졌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 신입생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한 행사가 비극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사고로 부산외대 학생 9명, 이벤트 회사 직원 1명 등 총 10명이 숨지고 204명이 다쳤다. 사고는 '사전제작 철골 시스템'(PEB)공법으로 만들어진 체육관이 행사 전 주부터 수일 간 내려 지붕에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으면서 발생했다. PEB 공법은 철골구조물을 세운 다음 외벽을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하는 방식이다. 힘이 많이 걸리는 부분엔 구성재료의 비중을 높이고 힘이 적게 걸리는 부분엔 비중을 낮춰 재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
'2월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해방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일본에서 한 젊은 시인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가 고향집으로 날아왔다.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29세 윤동주는 71년 전 오늘(2월16일)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혈장 대용 생리 식염수 체내 주입 실험으로 인한 사망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중국 지린성 화룽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시를 써서 발표했다. 그는 1936~1937년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구 사나' 등을 썼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때 '소년'지에 시를 발표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연희전문 재학 시절 그가 쓴 '자화상', '서시',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끌어안은 작품으로 평가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