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세계는 일자리 전쟁, 우리는…]<1부-4-1>창조경제 핵심=융합, 규제로 융합 원천차단
# A사는 한 번의 검사로 모든 유관 질병을 진단하는 ‘동시다중 분자진단 시스템’을 개발했다. 하지만 신기술을 평가할 기준이 없어 실제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 B사는 인공지능기술로 개인의 유전체 정보 등을 분석, 환자별 맞춤처방을 돕는 ‘맞춤의료용 분자진단 키트’를 개발했다. 하지만 생명윤리법상 유전자 검사 정보에 대한 가공이나 활용을 금지하고 있어 시장 창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유전자 검사는 의사의 의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상황이다.
# C사는 구글의 무인자동차와 같은 스마트카 기술과 지능형 교통망(ITS) 기술을 개발하다 중도 포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무선 주파수를 활용하기 힘든데다 무선 주파수를 할당 받으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었다.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칸막이식 규제와 기준 미비로 창조경제의 핵심으로 꼽히는 타업종이나 신기술과의 융합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박근혜정부가 국정 핵심과제로 내세운 고용률 70%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고용률 달성 로드맵의 핵심이 창조경제 활성화인데다 좋은 일자리 창출의 중심에 정보통신(IT)과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등이 융합된 서비스업종이 놓여 있어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원격진료(U-health)를 포함한 의료서비스업의 규제를 완화할 경우 오는 2020년에는 외국인 환자 유치에 따른 수익만 5조원에 이르고 이에 따른 생산유발 효과도 약 11조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양질의 일자리만 8만5000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규제 완화를 통해 글로벌 교육 서비스업을 육성하면 2020년에는 생산유발 효과가 8조5000억원을 넘고 일자리 역시 9만3000개 이상 생겨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 첨단의료 분야 ‘IT 강국’ 무용지물
스마트TV를 통해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거나 스마트폰으로 환자의 혈압이나 맥박 등을 체크해 처방하는 일이 가능할까? 스마트TV와 스마트폰, 인터넷 환경 모두 세계 1위인 대한민국이라면 이미 인프라는 상당부분 갖춰진 상황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현행 의료법에는 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의료지식이나 기술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환자와 의사가 원격으로 진료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원격진료를 위한 시설공간을 의무화해 방문이나 이동 중인 상황에서는 원격진료가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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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만성질환자에 대해 의사가 지정한 처방 범위에 따라 간소하의 처방이 인정되고 주치의 제도를 채택해 원격진료도 비교적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를 통해 스마트 헬스케어 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유비쿼터스 세상도 의료 분야는 예외다. 현행법에는 전자의무기록을 반드시 병원 내에 두도록 하고 있고 의료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주고 받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환자가 A병원에서 B병원으로 옮길 경우 기존 진료·검사 기록은 CD 등에 담아서 제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앞서가는 기술, 뒷북 치는 ‘기준’
지난 3월 구글은 약 시속 50km로 무인자동차(스마트카)를 사고 없이 운행하는데 성공했다. 현재의 기술 발전 속도라면 무인자동차 시대가 곧 열릴 것이란 다소 기대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세계5대 자동차 강국이지만 무인자동차는 아직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다.
우선 주파수 대역이 걸림돌이다. 미국이나 유럽은 5.8~5.9GHz 대역을 할당해 무인자동차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주파수 대역이 세계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5.7~5.925GHz 대역은 방송국의 이동기지국용으로 각 방송사에 할당돼 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서 무인자동차를 개발하려면 다른 주파수를 사용해야 하고 결국 국내용과 수출용을 따로 만들어야 하는 처지다.
개발 이후도 문제다. 무인자동차가 현실화되면 차량 제조회사들이 무선통신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결국 무선통신사업자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여기에 ‘주파수 경매제도’로 인해 무선주파수를 할당받으려면 거액을 지불해야 한다. 아직 확실한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리스크를 떠앉고 사업에 뛰어들 기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특히 자금력이 약한 벤처나 중소기업들은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사업 영역인 셈이다.
첨단 나노산업도 제대로 된 기준이 없어 사업화가 지연되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나노기술을 활용하면 세상에 없던 신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를 이용하면 기존 제품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철보다 수십배 강한 탄소나노튜브나 암세포만을 골라서 공격하는 항암제는 나노기술이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나노 물질에 대한 제대로 된 기준이 없는 상황이다. 일부에서 나노 물질의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기업 입장에서는 나노 물질을 활용하는데 리스크가 큰 상황이다. 실제로 D사는 나노 입자를 활용해 노화방지 효과가 있는 화장품을 개발했지만 선뜻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내 가전업계는 나노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2005년부터 항균 효과가 뛰어난 은나노를 활용한 세탁기와 TV, 모니터 등을 내놨지만 나노 물질에 대한 안전성 시비가 전개되면서 제품 생산을 중단했다. 당시 제대로 된 기준을 마련됐다면 국내 나노기술은 지금보다 몇 단계는 더 발전하고 활용도 또한 높아졌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심영섭 산업연구원 국제산업협력센터 선임연구원은 “융합기술의 발달로 융합제품이나 서비스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관련 법령이나 기준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오히려 장애가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며 “이는 새로운 융합산업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어서 진입장벽을 전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