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 "정부 취지는 공감하지만 개정안이 답은 아니다"
# 자산 2조원이 넘는 국내 상장 대기업인 A사의 이사회가 새롭게 꾸려졌다. 이사로 선임된 7명 중 4명은 외국계 펀드 및 기관투자자들이 제안한 후보였다. A사 경영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행여나 경영권이 장악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규모 투자는 꿈도 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영권 방어 대안 마련만으로도 벅찬데 투자가 웬 말인가.
# 미국 애플이 삼성전자 지분 1%를 취득하더니 삼성전자 자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빌미로 경영권까지 개입하려는 모습까지 보인다. 당하는 입장에선 억울할 따름이지만 어쩔 수 없다. 투기자본에 국내 대표기업의 지분 1%만 확보하면 자회사에 대해 얼마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두 사례는 정부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다. 경제계가 22일 상법 개정안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나섰다. 오는 25일 상법 개정안의 입법예고가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막겠다는 모습이다.
이날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 국내 19개 경제단체는 이날 서울 여의도 KT사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집행임원제 △다중대표소송제도 △전자투표제 의무화 정책 등 5개 사항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 기업 경영권 위태
현재 상장기업들의 감사위원회위원(이하 감사위원) 선출은 의결권 제한 없이 이사회 구성원을 선출한 뒤 구성원 중에서 뽑는 방식이다. 정부는 이를 '대주주 의결권 3% 이내 제한 하에서 감사위원인 이사는 분리선출하는 것으로 개정하려 한다.
이에 대해 경제단체들은 "이사 선임 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일"이라며 반대한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투기적 외국계 펀드 등의 경영권 장악이 가능해져 부작용을 낳는다는 이유에서다.
경제계에 따르면 외국계 펀드가 3% 의결권 제한 규정을 이용해 지분을 분산, 서로 규합하면 외국계 펀드 측 인사를 선임해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경영권 확보가 취약해지는 구조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로 인해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과도하게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국내 경제라는 주장도 뒤따랐다. 방어를 위해 자금 출혈이 심해지면 R&D(연구개발)와 시설 투자는 물론 고용까지 축소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3% 초과 지분을 보유한 기존 주주들의 주주권과 재산권이 침해되는 문제도 제기됐다. 상장사 주식의 20% 이상을 보유해야하는 지주회사의 경우 법정 최소 지분율만 확보하고 있어도 3%를 제외한 나머지 17%의 주식이 백지화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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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투표제 의무화 역시 기업 위험 초래
일정 이상 자산규모의 상장회사는 2인 이상 이사 선임 시 의결권이 있는 1주마다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집중투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집중투표제 의무화'도 논란이 거세다.
경제단체들은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최대주주와 2·3대 주주간 서로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이사회를 함께 구성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곧 의사 결정을 지연시키고 기업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덧붙였다.
특히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함께 시행되면 투기성 외국계 자본이 무차별적으로 경영권을 위협하는 사태가 발생될 것이라는 관측도 내놓았다. 외국계 투기펀드에 의해 선임된 이사들이 전략적 경영방해를 하면 이사회 운영이 어려워지는 탓이다.
이외에도 기술 집약적 기업은 영업비밀이나 독자기술 등 정보가 유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경제계의 설명이다. 결국은 기업지배구조는 강제할 게 아니라 기업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의 반복이다.
◇소니가 도요타보다 지배구조 우수? 검증 안 된 집행임원제
선택적으로 집행임원을 들일 수 있는 현행과 달리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집행임원제도를 의무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부분도 도마 위에 올랐다.
집행임원제를 선택한 소니가 그렇지 않은 도요타에 비해 지배구조가 우수하느냐는 질문도 이어졌다. 집행임원제 채택이 기업의 투명성을 보장하거나 경영성과를 좋게 만든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다.
경제단체들은 "집행임원제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없는 상태에서 도입을 강제하는 것은 기업에게 위험한 실험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업무진행과 감독의 분리로 이사회가 업무집행에서 배제되면 경영 효율성을 저해한다는 우려가 컸다.
이 제도 역시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맞물려 이사회를 장악한 외국계 투기 펀드가 집행임원을 선입할 경우 감독권뿐만 아니라 집행권 등 경영 전반에 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뒤따랐다.
또한 3% 이상(자산 2조 이상 기업은 1%) 주주는 집중투표제 청구가 가능하다는 현행 상법이 도입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도 반대 근거로 내세웠다. 제도가 도입되고 효과나 반응이 나오기 전에 또 다른 제도로 덧칠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다.
◇다중대표소송제도 '법리상 모순' 있어
현재 별도의 규정이 없는 '다중대표소송제도'는 남소를 부추겨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에서 반대 의견이 제시됐다. 오히려 국제 투기자본에 의한 악용 등 부작용을 초래해 국익을 저해한다는 분석이다.
정부가 개정하려는 안은 모회사(자회사 지분 50% 초과 보유회사) 발행주식 총수의 1% 이상 소유한 주주는 자회사에 대해 이사의 책임을 추궁할 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경제계에 따르면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외국계 투기자본이 악의적 소송을 지속 제기하며 이를 빌미로 경영권에 개입할 수도 있다. 소송으로 하락한 모회사 주식을 매집한 뒤 소송을 취소하는 식으로 단기차익을 노리는 상황도 가능하다.
결국 자회사는 모회사 주주의 소송 제기로 경영에 집중할 수 없고 결국은 자회사에 대한 외국 자본 투자가 감소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개정안은 자회사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허용해 상법의 기본 원칙인 법인격 독립성에 반한다는 입장도 내놓았다.
◇효과 불확실 '전자투표제', 꼭 해야 하나
경제단체들은 일정 이상의 주주를 가진 상장회사는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전자투표제'도 반대했다. 이사회 결의시 전자투표로 의결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현행을 유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전자투표제가 의무 도입된다고 해서 소수주주의 주주총회 참여율이 높아진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했다. 현행 주주총회에 소수주주의 참여가 저조한 이유는 직접 경영에 참여하기보다 일시적 투자수익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라는 분석에서다.
기술적 오류 발생 가능성도 점쳐졌다. 시스템 오류나 해킹, 바이러스 감염 등으로 전자투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 오히려 각종 소송에 휘말려 기업의 정상적 의사 결정이 침해될 수 있다는 논리다.
악의적 루머로 투표 결과가 왜곡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경제계의 주장이다. 이를 시행하려면 실무상, 제도상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강조됐다.

이같은 5개 사항에 대한 경제계의 입장은 한결 같다. 상법 개정안은 기업의 자율권을 빼앗고 획일적 지배구조를 강요하며 경영권마저 위협하고 있어 우려가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경제단체들은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고,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개정 취지에 대해선 공감하지만 5개 주제 모두 현행 제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개정이 아닌 현행 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이다.
이날 오후 경제단체 실무진들은 이번 건의 내용을 담은 의견서를 법무부에 전달했다. 법무부는 오는 25일 상법 개정안의 입법예고기간이 끝나면 정부안을 최종 확정해 이르면 내달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