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항상 새벽을 틈타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며 한반도를 침탈했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내부의 혼란에 빠져 국토를 내줘야 했다. 대륙 진출을 꿈꾸는 섬나라 일본 얘기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한·일 강제병합과 2차 대전 때도 그랬다. 최근 심상찮은 한·중·일 3국의 동북아정세가 아픔의 역사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분쟁,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갈등과 독도문제 등 갈등의 씨앗이 싹트는데, 국내 정치는 안개 속이다. 간혹 열리는 국회는 이념에 휩싸인 '기업사냥'에 몰두한다. 국력을 키워야 하는데 기업을 못 잡아서 안달이다.
한·일, 중·일의 갈등구조 속에 미국과 러시아까지 가세하면서 마치 대한제국 말의 혼란기를 연상케 한다. 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미국은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을 중국 견제용으로 활용하는 모양새다.
푸틴의 러시아는 구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한국은 물론 북한과의 협력 강화 등에도 나서고 있다. 이를 틈타 아베정권은 중국과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빌미로 자위대의 집단자위권을 현실화하며 군사대국의 꿈을 다시 키우고 있다. 군국주의를 기치로 아시아 열국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전범국가 일본이 패망한 지 겨우 10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대일본제국' 건설을 꿈꾼다.
과거 일본이 한반도를 침범할 때마다 한국을 직접 겨냥한 적은 거의 없다. 항상 중국을 빌미로 삼아왔다. 420여년 전인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도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열어달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외쳤다.
36명의 장수가 거느리는 4만~5만척(조선왕조실록의 추정)의 배에 탄 20여만명의 대군은 임진년 4월13일 새벽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와 부산포를 점령했다. 명을 치겠다는 명분은 허울 뿐 한반도 복속이 목적이었고, 부산포를 점령한 지 20여일 만인 5월2일 한양을 점령하는 등 일사천리로 한반도를 유린했다.
또 하나의 역사 속 장면으로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인 1894년 고종 31년 6월21일 새벽의 일이다. 이날 일본군 2개 대대가 새벽에 경복궁 영추문을 통해 대궐에 난입해 궁궐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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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주둔한데 대한 대응으로 '제물포 조약'을 내세워 고종이 거처하던 경복궁을 점령한 것. 겉으로는 고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한반도에서의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속셈을 담았다.
이는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청·일전쟁의 서막이었고, 이후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 강제병합으로 35년간 일제에 강점되는 역사의 서곡이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아픔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오늘날의 우리 정치현실과 너무 닮았다. 임진왜란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파로 국론이 분열되고, 일본의 전쟁 준비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고 갈등을 빚으면서 결국 국토와 국민이 유린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청·일전쟁 당시 상황도 마찬가지다.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뉜 조정은 세계사적 국제정세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다 민생이 파탄이 나 민초들이 어려움을 겪는데도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발단을 제공했고 외세의 개입을 허용했다.
이 같은 역사를 기록한 500년 역사의 조선왕조실록은 1910년 8월29일 순종실록으로 끝을 맺는다. 한·일 강제병합이 이뤄진 날이다. 이후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황제의 연호는 '대한 융희 4년'에서 '일 명치 43년'으로 바뀌었다.
2013년 11월 대한민국의 현실은 어떤가. 일본과 중국이 군비 증가에 열을 쏟고, 이어도까지 방공식별구역의 항공경계선을 그어놓았다. 일본이 이제 세번째로 다시 중국으로 가는 길을 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정치권은 당파적 이익에 휘둘려 싸우지 말고, 부국강병에 힘을 모을 때다. 100여년 전의 고초를 국민들이 다시 겪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