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甲속의 乙, 감정노동자 보호는?
몇일 전 택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뒷좌석에서 음료를 마시고 있자니 기사가 "향이 좋은데 어디 제품이냐"며 슬며시 말을 걸어왔다. 목이 마른가 싶어 하나 더 있던 음료를 건넸더니 단지 남양유업 제품이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평소 남양유업 제품을 즐겨 먹었는데 대리점 밀어내기 사태가 터진 후에는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패러디는 갑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갑들이 태어나는 해를 '갑인년'(甲人年)이라고 하는데, 이 가운데 갑의 최고봉인 '꼴깝'이 탄생한단다. 거북선이 강한 이유는 철갑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단다.
반면 을이 모여 있는 거리는 '을지로'(乙之路)라고 한다. 매년 을지훈련을 하는 건 사회에 을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로 넘겨듣기에는 왠지 씁쓸한 얘기다.
이처럼 갑을 문제는 큰 사회이슈가 되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건 '갑 속의 을'로 묻혀있는 감정노동자 문제다. 기업은 갑이요 소비자는 을이라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이 관계가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통업체는 반 이상 먹은 수박, 2개월 넘게 입은 코트가 몸에 맞지 않는다며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 같은 블랙컨슈머 문제로 고심한다.
백화점 관계자는 "1시간 이상 욕설을 하고 멱살을 잡거나 의자를 집어던지는 고객에 견디다 못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을 겪는 직원들이 허다하다"며 "퇴직자가 늘어 어쩔 수 없이 직원전문 심리치료와 정신과 상담을 제도화했다"고 토로했다.
금융권 심지어 병원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많다고 한다. 콜센터 여직원 성희롱부터 의료사고를 빙자해 위로금을 요구하는 환자가 상당하다. 보상금으로 월 200만원 이상 생활비를 챙긴다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르겠다.
문제는 이런 사례를 막을 법과 제도가 없다는 점이다. 기내식 때문에 여자 승무원을 폭행했다는 대기업 임원은 법적처벌 대신 자체징계에 그쳤다. 피해자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형사나 민사소송을 대신할 중간단계의 법규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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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소비자 보호제도로 고객은 갑이 된 반면, 감정 노동자를 위한 제도는 찾아볼 수 없다. 블랙컨슈머를 제재할 수 있는 소비자 기구를 만들거나 기업에 거래 거부권을 부여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