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총선의 결과는 상당히 복합적이었다. 한편으로 국민들은 자기폐쇄적 정치를 한 정부와 여당의 오만을 심판했다. 다른 한편으로 국민들은 새로운 야당을 일으켜 세워 오래된 야당에 각성을 촉구했다. 유권자들은 어떤 정당도 온전히 지지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어떤 정당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정당들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 것이다. 이러한 전략적인 선택은 유권자들이 매우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해석능력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당은 지도부 하나 꾸리지 못하고 있다. 야당 역시 강력해진 권한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도 하는 일이 없으니 노래를 제창으로 할지, 합창으로 할지가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이에 반해 국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경제성장은 불확실해지고 일자리는 불안해지고 복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치는 무엇이고 정당은 도대체 왜 필요한지 국민들은 다시 회의하기 시작했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사회 각 제도는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정치제도의 기능은 ‘집단적인 구속력을 가진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 전체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정책이 없으면 정치도 없다. 정치제도의 하나인 정당 기능도 역시 정책과 관련이 있다. 정당의 존재이유는 실현 가능한 정책을 개발해 국민들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연구단체와 시민단체도 정책을 개발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은 국민들의 의사를 수용하는 데 사활을 걸고, 이를 책임지고 실행할 현실적 또는 잠재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과 뚜렷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당들은 정책 수립에서 유능하지 않다. 여당은 행정부 정책을 국민의 시각에서 감시하고 개선하기 보다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가끔 돌출된 내부의 건전한 비판은 배신으로 추방된다. 정책의 빈곤은 야당에서 더욱 심각하다. 야당은 자체적인 정책 수립에 별 관심이 없다. 이에 따라 당원도 아닌 외부 몇몇 전문가가 당의 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여당과 협상을 주도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발생했다.
대표적 사례는 지난해 있었던 공무원연금 개혁이다. 개혁의 주요 결정은 연금개혁의 실무기구와 사회적 대타협기구에서 이루어졌다. 이들 기구에선 실제로 법안을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부를 대변하는 전문가들과 노조와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협상을 주도하고 결정했다. 이러한 정당의 책임방기는 사회적 대타협으로 포장되었다.
사회적 대타협기구가 국민의 의사를 수렴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유럽 국가들은 조합주의적 방식의 대타협을 통해 사회·경제적 위기를 극복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나라에서 대타협기구는 실제로 사회적 대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 국민을 대변하는 정당과 달리 이들은 종교단체 직능단체 노동조합 등의 특정 단체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이들 단체의 범위가 너무나 넓어서 실제로 국민 대부분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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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의 형편은 매우 다르다. 시민단체는 실제로 소규모 전문가 모임이며 노동조합 역시 소수 특정 노동자를 대변할 뿐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사회적 대타협에서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는다. 단지 일부 전문가의 개인적인 판단이 결정을 주도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개혁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책임은 다음 선거에서 국민들의 질책 대상이 될 정당이 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정당들은 정책개발을 외부 전문가에게 외주하는 일을 당장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실현 가능하고 일관된 정책을 스스로 개발하고 이에 책임을 지는 노력에 힘써야 한다. 정당이 정책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 국민들의 온전한 지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국민들은 경제불안, 고용불안, 복지불안의 삼중 불안에 시달린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당들에 치열히 경쟁해 불안한 미래를 안전하게 할 정책을 개발하고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정당들은 더 늦기 전에 자신의 고유한 임무인 전체 공동체 유지와 발전을 위한 결정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