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는 세상]


김원웅 광복회 회장이 올해 광복절 기념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에 대해 "일본 육군 대신을 흠모해 창씨개명을 했다"며 깎아내렸다.
김 회장이 백 장군의 창씨개명을 거론하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알기로 지금 공화당과 민정당을 두루 거쳐 공적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에모토 시마지(江本島次) 여사의 아드님 김원웅씨밖에 없다"며 김 회장을 저격했다.
지난 6월 한 매체가 제적등본을 근거로 김 회장 모친인 고(故) 전월선씨가 1940년 에모토 시마지(江本島次)로 창씨개명했다고 보도했던 것을 인용한 것이다. 보도 당시에도 김 회장은 "어머니가 창씨개명했을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광복회를 대표하는 김 회장이 '창씨개명을 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은 친일파'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논리다. 어쩔수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했던 80년전 한반도에 살던 이들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해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따르도록 한게 1940년 2월부터다. 그해 8월까지 80%이상의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신고했다. 불과 6개월만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 패망 직전엔 당연히 이 비율은 90%를 넘어 100%에 육박했다.
김 회장의 잣대를 적용하면 당시 한반도에 있던 조선인 대다수가 '친일파'가 된다. 하지만 당시 식민지 생활을 하는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창씨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개명을 하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관공서는 개명을 하지 않은 이의 공무를 처리해주지 않았다. 전쟁시기라 배급표로 식량을 타기도 했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집엔 배급표를 주지 않았다. 나중에는 개명하지 않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노무징용 대상자로 선발하기도 했다.
결국 일제 강점기를 거친 우리 부모들 대다수는 창씨개명을 했던 사람들이다. 광복 뒤 1946년이 돼서야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조선 성명 복구' 조치로 창씨개명했던 조선인들은 본래의 성명을 공식적으로 회복했다.
그런 역사적 아픔때문에 창씨개명을 이유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것은 자신의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것과 다름없는 저열한 행동이다.
한일합방 직후 일부 친일파가 자발적으로 일본식 성씨를 따른 경우가 있었지만, 그땐 오히려 일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을 두기 위해 1911년 '조선인의 성명 개칭에 관한 건'을 총독부령으로 시행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호적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이보다 앞서 일본식으로 고쳤던 친일파들의 성명을 오히려 본래의 조선식 성명으로 되돌리도록 강제하기도 했다.
그랬던 일제는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전시동원체제에 들어서자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조선인들의 자발적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창씨개명'까지 생각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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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에 관한 일제의 정책 변화와 연혁을 모른채 한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던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싸잡아 친일파라 공격하는 건 무지의 소치다.
기자의 할머니 1932년생 황완열씨는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봄, 일본에 가서 일하며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학교와 교사의 꼬임에 만 11세의 나이로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시 후지코시 20번지에 있던 후지코시강재공업주식회사에 '근로정신대'로 건너갔다. '제로센(零?)' 등 군수용 비행기 부품을 만들던 그 공장에서 해방을 맞이한 강제징용 피해자인 할머니의 당시 이름은 '도모다 간네쓰'였다. 그렇다면 국민학교 시절 일제 정책에 따라 가족 전체가 창씨개명을 했던 황완열 할머니는 '친일파'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