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갑자기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목돈을 의료비로 써야 한다. 가계에 부담이 된다. 아파도 병원 가는 것을 주저한다. 실손보험 환자에 기댄 의료기관은 수입이 준다. 정부는 가격에 개입해 적자를 키운 책임을 져야한다. 보험사가 망하면 보험계약도 위태로워진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요원하고 예금보험기금도 축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건강보험이 감당해야 할 몫이 늘어난다. 건강보험료의 급격한 인상은 실손보험료와 비교할 수 없이 지지율을 떨굴 것이다.
'결말이 뻔한 비극'은 '가상현실'이 아니다. 보험사는 이미 비상이다. 지난 9월 손해보험사 '빅5'가 '백내장 과잉·불법 진료가 의심된다'며 안과 5곳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DB손해보험은 백내장 수술 환자를 끌어모으려고 허위·과장 광고를 낸 안과 병·의원 43곳을 불법 의료광고 혐의로 보건소에 신고했다. 현대해상이 2019년부터 불법 의료광고 행위를 고발한 건수만 344건이다. 궁여지책이지만 어림 없다.
그런다고 전체 보험금의 절반을 타 가는 10%의 실손보험 헤비유저가 달라지지 않는다. 보건복지부는 백내장, 도수치료 등 과잉·불법진료가 의심되는 의료기관을 단속·처벌하는 것을 방기하다시피 하고 있다. 일부 가입자와 의료기관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1년에 한 번도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70%의 선량한 가입자가 보험료를 더 문다. 금융위원회는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한 것을 잘 알지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몸을 사린다. '보험료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게 맞다'고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이 소신을 말했지만 '정치공학적 계산' 앞에 무력해 보인다.
산수만 할 줄 알면 실손보험의 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실손보험금 지급액은 2017년 이후 연평균 16% 늘었다. 같은 기간 보험료 인상은 연 13%대였다. 그 차이 만큼 매년 적자가 쌓인다. 100원 어치를 팔면 130원의 손실이 난다. 보험연구원은 앞으로 10년간 누적적자가 100조원이 될 것이라고 추산한다. 자기부담금이 제로면서 보장이 컸던 1세대 실손보험과 그 다음으로 조건이 좋은 2세대 실손보험의 적자가 크다. 보험사는 장기보험 등 다른 상품에서 난 이익과 자산운용 수익으로 버티고 있다. 한계는 2025년이다. 그때부터 실손보험에서 생긴 적자로 인해 국내 모든 손보사가 당기순손실을 낸다. 시장의 요구를 외면한다면,연쇄 파산은 '정해진 미래'다.

이는 실손보험이나 몇몇 보험사가 아니라 손보산업 자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보험과 화재보험을 파는 손보사가 한 곳도 없다고 가정해 보라. 생명보험사도 무사하지 못한다. 보험산업의 이슈가 아니라 사회적 이슈로 비화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전에 실손보험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손보와 생보를 합쳐 15개 보험사가 판매를 중단했다. 의료보험 체계의 두 축 중 하나가 허물어지는 중이다. '의료공백'이 커진다. 기존에 팔렸던 실손보험의 보험금을 내 줘야 할 보험사가 문을 닫고, 그 계약을 떠안을 보험사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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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다면 풀고 가야 한다. 미루다 보면 나중에 걷잡을 수 없다. 보험료 폭등을 수용해야 할 시점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노후에 가장 필요한 상품인데 정작 은퇴자들은, 특히 1세대와 2세대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보험료를 내지 못해 계약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한폭탄'은 차기 정부 집권 4년 차에 터진다. 여야 후보가 '성공한 대통령'을 갈망한다면, 건강보험 보장을 강화하려다 실손보험 개선을 놓친 현 정부에 결자해지를 요청해야 한다. 보험료율은 시장에서 정하게 하되 제대로 감시하고, 법을 어긴 가입자와 의료기관은 단죄하겠다고 공약해야 한다. '비전 제시'가 별다른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