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가스프롬이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물량 일부에 대해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공급계약을 이행해야 하지만 전쟁이나 재난 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계약이행 의무를 준수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설마 하던 러시아의 가스수출 중단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불안감이 확산한다. 러시아로서는 전체 천연가스 수출물량의 70%를 유럽에 공급하므로 러시아가 이런 시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많은 이가 예상했지만 러시아로서는 천연가스 판매액은 GDP 대비 2%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10%에 이르는 석유보다 훨씬 부담 없이 전략적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러시아의 불가항력 선언에 따른 가스공급 중단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1950년대 시작된 독일과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통한 화해협력은 막을 내리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관계개선을 추진한 서독은 195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필요한 대구경 강관을 미국의 반대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소련에 공급했다. 미래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양국이 교역과 상호교류 확대를 통해 긴밀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서독 정치권의 판단이었고 이 과정에서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천연가스였다. 자국의 천연가스를 수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소련은 1968년 6월 오스트리아와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계약을 했고 서독은 1969년 1월 소련과 공식적인 협상을 개시했다. 1년여의 협상을 거쳐 서독은 소련에 파이프라인용 대구경 강관을 제공하고 파이프라인 건설에 필요한 비용 역시 독일 은행이 조달키로 했으며 소련은 20년 동안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합의했다. 3년의 공사를 거쳐 1973년 10월 소련 가스가 처음으로 서독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과 소련의 천연가스 협력은 계속 이어져 50년 가까이 유지됐다. 더 많은 가스를 공급받고자 한 서독은 1980년대 미국과 소련의 관계악화 속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소련과 협력관계를 이어갔다. 소련 역시 서독과 체결한 가스공급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고 이러한 관계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로 이어졌다.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저렴한 천연가스는 독일 제조업 경쟁력 부활의 원동력이 됐고 석탄에서 벗어나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에너지전환을 추진하는 데 있어 핵심 요소가 됐다.
계속 이어질 것 같던 양국의 천연가스 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제재를 통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공급중단이라는 파국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전쟁의 경과에 따라 앞으로 공급이 다시 이뤄질 수 있겠지만 양국의 신뢰와 안정성을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30년간 이어진 세계화도 막을 내리고 있다.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중단은 이러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 많은 관계가 더이상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재 상황의 판단과 미래 예측을 위한 모든 전제조건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아직 과거의 따듯함과 편안함에 젖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강 건너 산불이 바람을 타고 옮겨붙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