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대부분 인간 이전에 신들의 세계가 있었고 이후 신이 창조한 인간이 어떻게 그들로부터 독립하게 되는지를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린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은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강렬한 분노가 일상적이며 그 때문에 수시로 억압적인 힘을 휘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쩌면 이러한 신화는 인류문명이 제어 불가능한 폭력들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구상하고 그 실현을 추구해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인간이 같은 피조물인 동물과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기조도 유사하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본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제어능력 역시 인간 개개인의 능력을 지시하기보다 인간사회라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요소로서 인정된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이며 타고난 본능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동생활에서 모두가 자기 본능에만 따른다면 누군가는 자기 존재 자체도 유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 성범죄나 음주운전 등 타인의 안전에 위해를 가하는 욕망이 사회적으로 억압되고 처벌되는 이유다. 인간은 자기를 내세우기보다 한 걸음 물러남으로써 공존했고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내일의 희망을 연장해왔다.
제우스가 만물을 창조할 때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형제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앞서(pro-) 내다보는 선각자였던 형과 달리 뒤늦게(epi-) 생각하는 동생, 에피메테우스 때문에 인간이 동물들과 같은 다양한 능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인간은 동물처럼 기본으로 주어진 능력이 없지만 반대로 '무'에서 시작해 다양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순수능력을 가지게 됐다. 잘하게 타고난 것과는 다른 이 순수능력은 못하던 것을 잘할 수 있게 된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제어능력과 같다. 할 수 있게 되는 능력은 하던 것을 멈출 수도 있는 능력과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본래 부족함에서 시작한 능력은 그 능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짜 능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율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져 때가 되면 발현되는 본능도 아니고 조건만 주어지면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기계적 자동성도 아니다. 스스로를 제어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그저 사람이 동물이나 기계보다 우월하다는 위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신화를 찾는 것이 신의 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힘을 되새기는 것은 그것을 극대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의 화를 제어하지 못하고 복수에 복수를 반복하며 파멸하는 신들의 모습은 반면교사의 의미가 크다.
에피메테우스가 주는 교훈도 비슷하다. 뒤를 보지 못하는 그는 당연히 이면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인간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 형제가 못마땅한 제우스는 그들을 통해 인류를 파멸시킬 궁리를 하고 최초의 여자 인간, 판도라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 아내로 맞이하도록 한다. 탐욕과 고난, 질병 등 만악의 근원이 들어 있었다는 상자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상자를 연 판도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상자에 마지막으로 희망이 남아 있었다고 하니 제우스의 계획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불행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멈출 수 없는 운명도 아니다. 인간에게 호기심이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 깨닫는 행복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고통이 없다면 남은 희망이 무슨 소용이겠나. 오늘날 발달한 문명도 폭력과 불안을 지우지 못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은 지구를 아프게 하고 세계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우리에겐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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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멈춤의 용기가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