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과학과 종교

[청계광장]과학과 종교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2025.05.12 02:05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혜원 구리 신행선원장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자신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과학자의 신에 대한 믿음이 그의 연구에 큰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은 언제나 합리적인 증명을 요구한다. 또한 어제의 이론이 오늘 새로운 이론과 증명으로 끊임없이 수정·보완되는 것이 과학이다. 세계적 종교들은 대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그 과정에서 전승된 가르침이나 만들어진 경전들은 오류 내지 오독이 없을까. 대부분 종교는 경전의 무오류설을 주장하며 일말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는다. 의심 없는 믿음이 영험을 발휘하는 신앙적 측면에선 저런 문제의식 자체를 사탄이나 마군의 속삭임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과 시민들의 의식수준에 종교는 여전히 믿음만 강요한다. 과거와 달리 지적 수준이 높은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불교계에선 몇 해 전부터 윤회설에 대한 다소 떠들썩한 논쟁이 오갔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죽어서 또 다른 육신을 받아 환생한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었다. 얼마 전 기념일을 맞이한 인간 고타마 싯다르타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을 전했는데 여전히 이곳에서는 윤회하는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유명한 종교재판이 있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에서 과학이 잠시 고개를 숙인 장면이다. 오늘날 돌아보면 기독교의 흑역사가 된 장면이기도 하다. 종교적 교리의 쓸모없는 집착과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혹은 옳아야 한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저 모습이 기독교만의 모습일까. 저 모습은 모든 종교인이 깊이 새겨야 할 교훈이다.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은 함부로 확신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꿈 속에서만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물론 종교가 없는 세상이 완벽한 세상이라고도 하지만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다. 세상은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완전한 세상이므로 그렇다. 종교의 할 일은 사람들이 신이나 윤회가 있다고 믿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과학이 종교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면 현대는 종교가 과학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불교는 비교적 과학과 친한 편이긴 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마라습의 번역은 의도치 않게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줬고 유식불교는 많은 심리학자가 살펴보는 표준전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선불교의 선문답은 정치인들이 정쟁을 위해 금강왕 보검처럼 휘두르는 역작용이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종교는 과학적일 필요가 있다. 종교적 믿음이 가지는 힘도 중요하지만 그 믿음의 근거는 좀 더 세련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사람도 푸른 하늘을 보았고 지금의 사람도 푸른 하늘을 비슷한 감성으로 보고 있다. 온갖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늘 빛깔을 보고 빛의 스펙트럼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온전한 믿음은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더욱 굳건해지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가르침을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한다. 방편이라는 말이다. 방편이라서 가짜가 아니라 용도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도구의 쓰임을 정확히 알아야 도구를 더욱 잘 쓸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가르침은 사람들의 해방과 평온이 주된 목적이다. 사후나 영혼의 이야기는 그것의 수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붓다는 독화살에 비유한 것이다. 화살을 뽑고 치료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선불교에서는 그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이성적이거나 감성적인 모든 일로부터 지금 당장 벗어나라고 달려든다.

천동설도 지동설도 모두 틀렸고 모두 맞았다.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허공뿐이다. 허공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다 할 만한 것인가. 2569살이 된 붓다에게 묻는다. 인공지능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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