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영원히 깨질 수 없는

[청계광장]영원히 깨질 수 없는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5.08.11 02:05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대형 연예기획사의 아이돌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의를 한 적 있다. 열여섯에서 열아홉 살 정도 되는 소년들인데 무척 예의 바르고 씩씩했다.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데뷔를 준비하는 연습생들이 대단하다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러웠다. 학습된 싹싹함, 주입된 예의범절, 만들어진 쾌활함 같은 게 느껴졌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인기다. 줄여서 '케데헌'인데 여기에 나오는 '혼문' '귀마' '사자보이즈' '소다팝' 등을 모르면 대화에 낄 수 없다. 나는 펑펑 울면서 봤다. 우선 나름 40대 '트민남'(트렌드에 민감한 남자)으로서 공개된 지 한 달이나 지나 '케데헌'을 봤다는 게 원통해 속으로 울었다. 진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린 것은 영화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다. '헌트릭스' 멤버인 루미, 미라, 조이가 'What it sounds like'를 부르면서 귀마를 무찌르고 혼문을 걸어잠그는 장면에선 2002 한일월드컵의 안정환 골만큼 가슴이 벅찼다.

'케데헌'은 케이팝만의 화려하고 역동적이면서도 키치적인 매력에다 김밥, 라면, 목욕탕 등 한국 문화의 특수성을 조화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시지가 아름답다. 출생의 비밀로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동료와 대중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루미,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힌 채 가족에게 외면받으면서 거친 성격을 갖게 된 미라, 겉으론 쾌활하지만 늘 남의 눈치를 보며 타인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는 조이 등은 저마다 상처를 지닌 인물이다. 팬들의 시선과 기대, 미디어의 관심, 차트경쟁 또한 벗을 수 없는 굴레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인 '악령'의 목소리는 사실 인물들 내면의 두려움과 부정적 생각,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악플, 품평, 자극적 보도가 만들어낸 '마음의 소리'다.

영화는 이들을 트라우마와 한계를 쉽게 극복하는 초월적 영웅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헌트릭스 멤버들은 자신의 상처를 외면하고 감추는 대신 "흉터조차도 나의 일부"임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서로의 불완전함을 서로가 감당한다. 어느 시구처럼 "모두가 조금씩 아파주면 한 사람은 아프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고"(조온윤, '원주율') 물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빈 곳을 채우는 연대의 힘을 통해 악령의 목소리를 이겨낸다. 몇 년 전 '걸스데이의 어느 멋진 날'이라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모처럼 휴가를 얻어 일본 오키나와에 간 걸스데이 멤버들이 오픈카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낭만적인 순간에 민아가 외친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어!"

지금은 화려한 위상을 누리지만 지난 30년 동안 아이돌 음악산업이 걸어온 길은 험난했다. '응답하라 1997'에서 성동일은 방안을 온통 H.O.T 사진으로 도배해놓은 딸 시원에게 "이 원숭이 새끼들이 뭐가 좋다고!" 소리 지르며 사진을 다 찢어버린다. 아이돌그룹에는 금붕어, 꼭두각시, 딴따라, 로봇 등의 오해와 멸시가 늘 따라다녔다. '케데헌'을 보면서 몇 년 전 만난 연습생들을 떠올렸다. 케이팝의 화려한 빛 이면에는 태릉선수촌이나 군대를 연상케 하는 혹독한 육성시스템이 있다. 이 산업에서 아이돌 연습생들은 진짜 자신을 잃고 대중이 원하는 상품으로만 살아갈 수도 있다.

헌트릭스의 승리는 멤버들의 화합과 팬들의 응원에서 비롯된다. 이 '함께'의 감각이야말로 영화의 최종 메시지다. '케데헌'의 흥행은 우리가 함께 사랑한 음악, 함께 사랑한 순간, 함께 통과한 시절의 메아리다. 힘겨운 연습생 시절을 견딘, 또 견디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에게, 그들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던 아이돌 팬들에게, 기성세대로부터 무책임하고 나약하다며 손가락질받는 청년세대에게,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맞추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제 안에 어둠과 상처를 지닌 이들에게, 자기 안팎의 부정적인 소리에 힘겨워하는 모든 이에게 헌트릭스는 말한다. "서로가 있는" 연대 가운데 넌 혼자가 아니라고, "영원히 깨질 수 없는"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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