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조선업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 나라가 점차 선진국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발전도상국 중에서 과거 수십 년 동안 조선업에서 일정 이상의 성공을 거둔 곳은 한국뿐이다. 그 뒤를 이어갈 나라가 없는 것은 이 세계에는 후발국의 참여를 저지하는 큰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최대의 장벽은 거액의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정부 주도의 강력한 경제정책 때문이다.'
인용한 내용은 에몬 핑클톤이 1999년에 펴낸 책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의 한 대목이다. IT 붐이 한창이던 당시, 핑클톤은 오히려 전통 제조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제조업이 IT 산업보다 모든 계층의 인재를 활용해 더 나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출하기 쉬운 특성이 있으며, 막대한 자본과 독점적 노하우에 기대 생산성 향상을 지속할 수 있다고 했다. 고용 효과는 조선업이 번성할 때 울산과 거제의 일자리와 1인당 GDP를 떠올리면 된다. 배를 주문하는 곳은 90% 이상이 외국 선사다. 거대한 생산능력과 노하우는 한 국가가 단기간에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다.
핑클톤이 한국 뒤를 이어갈 나라가 없다고 썼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더 강력하게 국가 주도의 지원 정책을 펴 온 중국이 조선업의 세계에 들어섰고, 압도적인 점유율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선두를 달렸던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 시장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업의 패권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사이, 미국 조선업은 몰락하다시피 했다. 이지스함 건조에 한국은 6억 달러, 미국은 16억 달러가 들 정도로 생산성 격차가 커졌다.
조선업을 비롯한 제조업이 무너지면서 IT와 금융산업에 치중했던 미국도 방향을 틀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제조업 부흥을 위해 '리메이킹 아메리카(Remaking America)'를 슬로건으로 삼았고, 바이든 행정부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트럼프 행정부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내세웠다. 제조업의 중요성에 대한 달라진 인식과 지정학적 상황의 급변은 자본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거듭난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기회가 되고 있다.
한국 조선업은 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에서 격차를 벌리며 우위를 굳히고 있다. 존 펠런 미국 해군성 장관이 실시간 건조 상황을 확인하는 디지털 시스템에 감탄한 것은 이런 단면을 드러낸다. 기술 혁신을 통해 첨단 산업의 면모를 갖춘 한국 조선업은 미국과 관세 협상의 판을 바꾸는 게임체인저가 됐다. 한국은 '마스가 프로젝트(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를 제안해 조선업 부활을 꾀하는 미국의 의중을 짚었다.
이 프로젝트는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펀드를 만들되 1500억 달러를 조선업에 투자하는 것이 골자다. 미국 내 조선소 건설과 유지·보수(MRO) 사업, 인력 양성, 공급망 재구축 등도 담겼다. 미국도 전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의회는 지난 1일 한국 등 동맹국에 자국 조선 시장을 여는 법안(해운 동맹국 파트너십 법안)을 발의했다. 미국 함정과 주요 부품의 해외 건조를 금지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도 개정 논의를 시작했다.
이런 시점에 이른바 '노란봉투법'은 조선사의 행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근로 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으로 노동 쟁의의 범위를 확대하면 미국 투자나 공장 이전을 막는 파업을 야기할 수 있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로 사용자 범위를 넓히면 원청 업체인 조선소가 수천여 개의 하청업체와 1년 내내 협상을 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과 관세 협상 후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겠다"고 말했는데, 조선업은 관세 협상에 기여한 '국력'의 핵심이다. 정부·여당이 국력 증진을 위한 의사결정을 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