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이 무거운 자가 먼저 무너진다[MT시평/이윤학]

갑옷이 무거운 자가 먼저 무너진다[MT시평/이윤학]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2026.05.15 02:00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성경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온종일 필사를 몇달동안 해야만 했다. 지식은 귀했고, 귀한 지식은 곧 권력이었다. 성직자들은 신의 말씀을 독점했고, 면죄부는 그 독점이 만든 강력한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낫다"고 외쳤다. 이 외침은 막 등장한 인쇄기를 타고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결국 인쇄기는 지식의 독점을 무너뜨렸다.

요즘 글로벌 IT업계에서는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라는 말이 돈다.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와 Apocalypse(종말)의 합성어로, AI 에이전트의 등장으로 SaaS의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워드로 문서작업하고, 엑셀로 연산작업을 하며, PPT로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제는 AI가 여러 애플리케이션에서 데이터를 읽고, 문서를 쓰고, 업무를 실행한다. 인간이 소프트웨어를 쓰던 시대에서, AI가 소프트웨어를 쓰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전쟁의 방식이 바뀌는 순간에 가깝다. 13세기 칭기즈칸의 몽골군이 그랬다. 당시 유럽의 철갑 기사단은 무거운 갑옷, 거대한 군마, 봉건 영주의 네트워크 등 쉽게 무너지지 않는 권력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은 빠르게 이동했고, 끊임없이 우회했다. 분산과 기동성이 그들의 무기였다. 철갑 기사의 무게와 권위는 초원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오늘날 화이트칼라는 중세 기사를 닮았다. 학력, 자격증, 전문용어, 조직 경험은 현대판 갑옷이다. 대기업의 SaaS는 잘 쌓인 성벽이다. 그러나 AI는 이 구조를 우회하기 시작했다. 몽골군이 성문을 정면으로 두드리지 않았듯, AI 역시 복잡한 메뉴와 결재 단계를 건너뛴다. 변화의 본질은 자동화가 아니라 '속도의 혁명'이다.

인쇄혁명을 일으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책을 빨리 만든 기술이 아니라, 지식의 복제 비용을 폭락시킨 사건이었다. 수도원에 갇힌 지식이 거리로 쏟아졌고, 성직자의 정보 독점은 흔들렸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시민사회의 등장은 결국 정보 민주화의 산물이었다.

AI도 같은 흐름을 만들고 있다. 과거 화이트칼라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였다. 회계사는 회계 기준을, 변호사는 법조문을, 애널리스트는 데이터를 독점했다. 이제 AI가 정보를 저장하고, 분석하고, 요약하고, 생성한다. 수도원 필사승이 인쇄기 앞에서 느꼈던 불안이 지금 화이트칼라 사회에서 되살아나고 있다. 역사에서 엘리트가 사라진 적은 없다. 중세 기사는 근대의 장교와 관료가 됐고, 일본의 사무라이는 기업인과 행정가로 옷을 갈아입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공통점은 시대의 변화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AI 시대도 다르지 않다. 정보를 쌓아 두는 사람이 아니라, AI와 함께 더 빠르게 판단하고 연결하고 창조하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중요한 것은 정보의 양보다 맥락을 읽는 힘이고, 전문지식보다 영역과 영역을 잇는 통찰이다. 몽골 기병이 철갑 기사를 흔들었듯, 인쇄기가 수도원의 벽을 허물었듯, AI는 사무실의 벽을 흔들고 있다. 문명을 뒤흔드는 변화는 늘,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자리에서 시작됐다. 지금 가장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는 자, 그가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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