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순(여수·순천)사건에서 당시 국방경비대 14연대의 무장반란을 "부당한 명령에 맞선 행위"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 출동명령을 거부하며 일으킨 반란이고 그 진압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희생이 발생한 사건이다.
제주 4·3사건은 1948년 5월10일 제헌 총선거가 다가오자 남로당 제주도당이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벌인 무장투쟁이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희생됐다. 이 무장투쟁을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 김달삼은 1948년 말쯤 북으로 도주했다.
이들의 제주선거 방해라는 목적은 달성돼 1948년 5월10일 제헌국회 지역구 200석 중 198석은 당선자를 배출했으나 제주의 두 선거구는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제헌국회는 제주 2석이 결원된 198석 상태로 개원했다.
이 제헌국회에서 1948년 7월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됐고 3일 후 제헌의원 198명의 투표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당선됐다. 대한민국의 분립된 3권 중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는 입법권과 행정권의 구성에 제주는 참여하지 못했다. 1948년 정부수립은 북한의 총선불참으로 반쪽의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제주지역의 강제된 불참으로 그 의미가 더 적어졌다. 남로당은 1946년 11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열 3당이 합당해 탄생한 정당으로 1946년 8월 북한 지역에서 창당된 북로당과 1949년 6월 합당해 조선로동당이 됐다.
이런 역사를 보면 남로당의 토대와 활동무대는 남한이었지만 북한과 무관할 수 없는 정당이다. 왜 남로당은 그토록 격렬하게 제주를 남한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했을까. 그 이유는 지정학이다. 남북의 분단으로 북한의 서해와 동해가 분리됐고 북한의 전함이나 상선이 서해와 동해를 오가기 위해서는 제주의 남쪽을 둘러서 가야 하는 비효율이 있었다. 2000년대 남북관계가 개선된 국면에선 북한의 민간 상선들이 제주와 목포 사이 제주해협을 통과하기도 했으나 2010년 천안함 사태 직후 중단됐다.
그 후에도 북한은 제주해협 통과를 요청했다. 북한의 김정은은 2022년 동·서해 연결 대운하 구상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주의 지정학은 미국에 있어 파나마운하를 연상케 한다. 미국은 양 대양에 접한 해양대국이나 양 대양의 함대교류는 칠레 남단을 둘러가야 하는 비효율이 있었고 이는 미국에 의한 파나마운하 건설로 이어졌다. 현재도 파나마는 미군의 지배하에 있다.
당시 남로당은 제주를 남한으로부터 분리하는 게 긴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는 신생 한국의 입장에선 묵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분단이었고 국가와 국토의 통일성 침해였다. 이 민감한 주권의 문제가 제주와 여순에서 무장충돌의 격렬함을 더했을 것이다. 제주의 분리를 막기 위해 여순의 부대를 동원해야 했던 국군 지도부가 내린 명령이 부당한 명령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