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각각 다른 시간표대로 이동하느라 분주한 모습… "평가 방법 전환도 필요"

지난 22일 오후 2시30분 인천신현고 복도. 쉬는시간 종이 울리자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수업을 받을 교실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듣고싶은 수업을 직접 신청하는 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간표가 다르다보니 동선도 제각각 엇갈렸다. 일부는 복도 곳곳에 설치된 사물함에서 다음 수업에 필요한 책을 가져가기도 했다. 학생들은 신용카드 크기만한 이름표와 함께 과목별 교실 호수가 적힌 시간표를 목에 걸고있었다.
2학년 한호은양은 이날 1교시에 들었던 '화학과제연구'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화학과제연구 과목은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정해 한 학기동안 실험하고 보고서를 쓰는 식으로 진행된다. 한양은 "치약을 활용한 해충박멸법에 대해 연구 중"이라며 "오늘은 다른 종류의 치약들을 발라 개미를 풀어놓고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실험에 필요한 개미 등은 본인이 미리 인터넷 서핑을 통해 찾은 판매 사이트 링크를 선생님에게 전달해 구입했다.
쉬는시간이 지난 후에도 일부 교실에선 소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꾸로교실' 체제로 운영되는 1학년 한국사 수업에서는 교사가 교실을 돌아다니며 과제물을 체크하느라 소란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학생들이 수행할 조별 과제와 게임 '조선의마블'에 대해 설명이 시작되자 교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학생 수요 조사하고 가르칠 이 없으면 강사도 영입
신현고는 문재인 대통령이 교육공약 1호로 내건 '고교학점제' 모델과 유사한 학교로 최근 주목받았다. 이 학교는 지난 2015년부터 3년째 학생들이 직접 수강신청을 하고 수업을 듣고있다. 예고 없이 찾아간 신현고에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학생들이 교과별 교실로 이동해 수업을 듣는 장면이 목격됐다. 교실은 과목별로 분류돼있었다. 예컨대 '국어존'에는 국어 과목 교실만, '사회존'에는 사회 과목 교실만 대여섯개씩 모여있었다.
신현고의 학사 과정을 살펴보면 고교학점제의 특징을 몇 가지로 추출해낼 수 있다. △학생에게 수강 선택권을 주고 △과목별 교실이 따로 존재하며(교과교실제) △수업은 학생참여를, 평가는 과정평가(성취평가제)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학생들의 선택을 돕기 위해 신현고는 신학기가 시작되기 반년 전부터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개설가능한 수업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한다. 10월부터는 학생들로부터 수강 신청을 받고 다음해 2월에 최종 학사 일정을 확정한다.
이덕범 교장은 "대부분 학교에서는 50여개 과목이 개설되지만 우리학교에는 총 80여개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며 "학생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찾도록 학생에게 철저히 선택권을 주고 학교에 가르칠 사람이 없으면 외부 강사도 영입한다"고 강조했다. 겉으로만 학생이 신청하도록 하고 실제로는 대입과 관련된 주요 과목 수강을 유도하는, 형식적인 자율권이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올 1학기 신현고에서는 인문학적 상상여행, 스페인어, 환경과녹색성장, 심리학, 교육학, 보건 등 일반고에서 보기 힘든 과목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학교 과정의 수학을 가르치는 '기초수학', 고급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무학년제 '크리티컬 리딩(Critical Reading)' 등 수준별 수업도 있다. 이 모든 수업은 신현고가 만든 과목이 아닌, 교육부와 인천교육청에서 제시한 개설 가능 과목이며 현행 제도로도 일반고에서 얼마든지 개설할 수 있다는 게 이 교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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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수급은 1차적인 문제, 더 중요한 것은 협조 유도"
비슷한 형태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가 많이 없다보니 신현고도 잦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 교장은 문재인 정부가 고교학점제를 도입할 경우 교원 수급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신현고는 올해는 보건학 수업을 할 강사를 채용키로 하고 당사자와 계약서까지 썼는데 수업 시작 직전 갑자기 사의를 표해 교내 보건선생님이 대체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 2명이 프랑스어 수업을 듣겠다고 했는데 강사를 구하지 못해 수업을 열지 못하기도 했다.
수많은 과목을 편성하다보니 정규 수업 시간 외에 수업을 듣거나 예기치 않은 공강에 맞딱드리는 경우도 있다. 이 교장은 "지난해의 경우 경제학 수업을 듣겠다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학생들의 수업 일정이 각각 다르다보니 도저히 정규 수업 시간 내에 편성할 수 없어서 아예 야간에 수업을 진행했다"며 "수업 시간 조율을 위한 체계적인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교학점제의 경우 성취평가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최영선 신현고 교감은 "수강생이 적은 과목의 경우 석차, 비율을 기반으로 한 등급제로 성적을 매기면 낮은 등급을 받을 확률이 커진다"며 "수강생이 많은 주요 과목으로 학생이 쏠리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평가 방법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최 교감은 "현실적인 염려를 반영한다면 국어, 영어, 수학 등 수능과 연계되는 과목은 석차를 병행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고교학점제의 특징을 고려할 때 지필 평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도 제안됐다. 최 교감은 "우리학교는 학생 참여형, 과정평가형 수업이 많다보니 중간고사 때는 시험을 안 보는 수업이 상당히 많아졌다"며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중간고사를 없애다보니 이번 시험기간은 3일에서 2일로 단축하려고 검토했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지필고사 대신 수업 중 과정평가로 바꾸고 점수를 평가 때마다 공개했더니 지필평가보다 컴플레인도 줄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교사들은 고교학점제의 성패가 교사의 잡무 경감과 적극적 협조에 달려있다고 당부했다. 이 교장은 "다른 공립고와 비슷한 예산을 받고 있는 우리가 학점제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교사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교사들도 수업 방식을 바꾸는 데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모델을 도입한 첫 해엔 교사들이 '이런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당황해 하길래 수업 잘한다는 교사들을 전국에서 불러다가 열심히 연수를 했습니다. 교사들의 잡무도 확 줄였어요. 예를 들어 웬만한 교내 경시대회는 전부 수업 시간에 해결해버립니다. 글짓기 대회를 국어시간에 해결하는 거죠. 그런 식으로 교사들에게 수업에 집중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면 성과는 분명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