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안 "요즘 서울 구석구석 걸어요"

이계안 "요즘 서울 구석구석 걸어요"

심재현 기자, 사진=이명근
2009.12.16 10:33

[머투초대석]

크레인이 굉음을 내며 20톤짜리 철골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좁아진 교차로를 건너려는 버스와 승용차가 몰려 엉겼다. 신호등이 바뀌고 여기저기서 경적이 터져나오는 사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마천루가 저녁 햇살에 노랗게 반짝였다.

"지금의 서울은 겉모습만 번지르르합니다. 그 속에 사람은 없죠."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이계안 전 민주당 의원이 길 건너편 공사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하를 넘나드는 날씨. 하얀 입김이 새어나왔다.

이 전 의원은 40여년 전 서울에 왔다. 대학생이 된 뒤로 쭉 서울에 살았다. 그동안 손꼽히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지내고 17대 국회의원으로 4년을 보냈다. 그만큼 서울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나 직장, 집과 자주 가는 곳을 뺀 서울은 여전히 낯선 곳이었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어떤 이웃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 턱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전 의원은 그래서 서울을 걷기 시작했다. 지난 7월22일 동작구 흑석동 한강변에서 시작한 '서울 걷기'는 4달이 넘었다. 이날도 서울시 동대문구 창신동을 다녀왔다. 57번째 '서울 걷기'였다.

차로 갈 수 있는, 눈에 잘 띄는 큰 길이 아니라 빌딩 숲 뒤에 감춰진 좁은 골목길 사이의 일상이 어떤지 직접 보고 느끼겠다는 게 목표다. 이미 그의 머리 속엔 4달반동안 만난 서울의 오래된 일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 그동안 서울 구석구석을 걸으며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많아졌더군요. 텅 빈 아파트 놀이터를 보니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고 그나마 있는 아이들조차 맘 놓고 뛰놀 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는 걸 느꼈습니다. 또 걷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보도 블록은 파헤쳐 있고 5분만 걷다보면 공사를 하고 있고 곳곳이 공사장입니다. 서울의 출퇴근 차량 속도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시속 17㎞라고 합니다. 자전거 속도죠. 도로 1㎞를 건설하는 데 100억원이 드는데 99억원은 땅 보상비로 나간다고 합니다. 이런 고비용 구조로는 서울을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막대한 예산을 건물, 도로에 쏟아붓는 건 옳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10대는 입시지옥, 20대는 취업전쟁, 30~40대는 내집마련, 50~60대는 노후불안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문제를 우선해야지 않겠습니까. 전환점이 필요한 거죠.

- 그런 고민의 연장선에서 연구소를 창립했다고 들었습니다.

▶ 2.1 연구소라고 합니다. 어떤 영상이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2.1'은 서울시가 합계출산율 2.1명을 목표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 저출산 문제를 지적하는 것인가요.

▶ 저출산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합계출산율이 2.1명은 돼야 현재의 인구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2.1로 가는 과정은 단순히 과거 국가주도의 인구정책으론 불가능합니다. 양육비 부담을 조금 덜어준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육, 교육, 양성평등, 일자리, 노후불안, 교통, 문화까지 뒤엉킨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종합적인 원인 진단과 실천이 필요한 거죠. 싱크탱크 2.1은 이런 종합적인 처방을 준비하는 연구소가 될 겁니다.

- 말씀하신대로 서울시민이 인구과밀과 교통체증으로 불편을 겪고 있으면서도 인구분산이나 지방이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견이 적잖습니다. 세종시 논란이 그런 예인데 해법은 뭐라고 보십니까.

▶ 서울이 지속가능한 도시로 스스로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오세훈 서울시장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재건축해서 거주비용 높이고 원래 살던 사람은 외곽으로 내보내는 식으로 서울을 가볍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이건 방법이 잘못된 겁니다. 서울이 '없는 사람'이 쫓겨나는 도시가 아니라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균형감 있는 도시가 되게 해야 하죠.

그동안 서울은 지방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결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대한민국 수백개 시·군·구에 사는 국민 가운데 누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1번 타자겠습니까.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받아들여야죠.

또 공무원이 내려가야 하나 서울시민이 내려가야 하나를 보면 결론은 분명합니다. 비효율 문제는 공무원이 앞장서 해결해야지 국민에게 떠넘겨선 안 됩니다.

- 인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은 공감이 가지만 집값 하락 같은 불안감을 없애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정부 1청사가 없어진다고 해서 서울에서 오페라 극장이 사라지고 지하철 건설 계획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개선하는 시설이 들어설 곳이 더 많아진다는 역발상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전기관 터에 2.1 정신을 담아서 보육시설이나 노인시설을 세우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시를 꾸려나가는 방식에서 문제점을 짚는다면요.

▶ 예산을 쓸 때 무엇을 우선하느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서울시는 규모와 효율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광장, 대학로 실개천 등 수십억원의 혈세가 길바닥에서 낭비되고 있습니다. "저걸 내가 지었다"고 홍보하는 전시행정이 돼선 곤란하죠. 사람을 우선해야 합니다. 정말 필요한 곳에 예산을 배정하고 누구를 배려해야 할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를테면 치매노인센터를 짓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되면 수용인원이 한정됩니다. 건물 짓는 예산을 풀어서 간병인을 교육하고 노인들의 집에 찾아가 돌보게 하면 일자리도 생기고 일석이조입니다.

- 현대자동차 CEO로 일했던 만큼 CEO리더십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기업과 국정운영, 지자체 운영이 뭐가 다르냐는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능률을 중시하는 게 CEO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능률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능률을 중요시하면 승자독식도 가능하지만 정치는 과정도 중요하고 약자나 패자도 배려하고 돌봐야 합니다.

기업인이 잘 할 수 있는 것도 있습니다. 기업은 소비자와 소통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소비자 자리에 국민을 넣으면 됩니다.

능률만 강조해도, 통합과 배려만 강조해도 안 되겠죠. 경영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 통합하고 소통하려는 자세를 갖는다면, 이런 사람이 지자체장이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우리 정치풍토가 왜 신뢰를 받지 못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개인적으로는 정치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능력있는 사람이 해야죠. 정치인들을 보면 저렇게밖에 할 수 없나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반성도 하죠. 정치가, 정치를 긍정적인 데로 끌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 공식발표는 안 했지만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7대 국회의원을 하다 지난해 18대 총선에서 불출마를 선언한 뒤 다시 서울시장을 준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2004년 정계에 입문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1번만 하겠다고 했죠.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었고 가족과의 약속이었습니다. 국회의원과 달리 지자체장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일을 추진하느냐가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업인 출신이라 그쪽에 더 잘 맞는 것 같습니다.

- 연말정국이 복잡합니다. 당내 경선이 첫 관문일텐데 어떤 복안을 갖고 있습니까.

▶ 원칙대로 밀고 나갈 생각입니다. '서울 걷기'도 계속 해 나갈 생각이고 2.1 연구소 출범을 계기로 정책대안도 발표할 겁니다. 서울시장 선거는 인기투표라는 말도 있지만 정직하게 밀고 나가면서 준비된 후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연내에는 공식 출마 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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