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 6월 항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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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전국 시내 곳곳에서 차량 경적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흰 손수건을 꺼내 흔들어 하얀 물결을 만들어냈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본부(이하 국본)'의 주최로 '6·10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시작된 순간이다. 국본의 방침대로 차량 경적소리가 울리자 민주주의에 목마른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6월 민주 항쟁이 시작된 순간이다.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하자 서울 쪽 시위대들은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이내 명동 성당은 경찰과 시위대의 팽팽한 대치 현장이 됐다. 당시 치안본부장과 안기부 차장이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려 하자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나를 밟고 가라'며 그들을 제지했다. 추기경의 보호 덕분에 항쟁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더 이어질 수 있었다.
6월 민주 항쟁은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극에 달한 시민들이 벌인 전국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다. 6월 10일 시작해 29일까지 약 20일 가량 이어졌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4·13 호헌조치 발표가 화근이었다. 호헌 조치란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수호한다는 의미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 골자다. 기존의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이 개정되며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길 기대했던 국민들은 호헌조치 발표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4.13 호헌 조치 발표 후 각계각층에서 비난 성명이 이어졌다. 재야세력과 통일민주당은 연대해 5월 27일 국본을 발족시킨다. 국본은 6월 항쟁을 이끈 중요한 동력으로 평가된다.
6월 항쟁이 벌어진 직접적인 계기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1987년 1월 13일 서울대 재학생이었던 박종철은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을 잡으려는 수사관들에게 연행됐다. 심문 중 온갖 폭행, 전기고문 등을 당한 그는 끝내 숨지고 만다.
당시 경찰은 고문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탁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가족의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주검을 화장시키며 증거 인멸을 시도하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분노한 학부모와 학생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그러던 중 5월 18일 김승훈 신부가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중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폭로했다. 5공의 전횡에 직면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이에 국본은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의 전국적인 개최를 계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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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간의 투쟁을 견인한 기폭제는 22살 청년의 죽음이었다. 대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가한 재학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혼수상태(7월 5일 사망)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시민들의 울분은 활화산처럼 터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는 6월 29일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국민 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이뤄졌다.
6월 민주화 항쟁으로 군부 독재 정권은 퇴진하게 된다. 6월 민주항쟁으로 대한민국에 뿌리내린 민주주의는 1980년대 후반 시민운동이 농민집회, 전국 대학생 대표 협의회, 노동자 투쟁 등 각 분야로 분화되는 구심점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