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한 달에 2만 명 정도가 사망한다. 하루 6백 명이상이 세상을 떠나는 셈. 하루 하루가 죽음이 낯설지 않은 상황이지만 올해 가을을 맞는 기분은 웬지 허전하다. 유난히 국민들과 함께 했던 분들이 잇따라 돌아가신 한해였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잇따라 우리 곁을 떠났고 배우 최진실, 장진영의 죽음도 우리를 슬프게 했다. 밖으로는 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에 이어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이 유명을 달리했다.
산다는 것이 곧 죽음과 벗하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사실 서양의 경우는 산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생사의 공간이 같이 섞여 있다. 주택가에 묘지가 있어 공원 역할을 하고 아예 성당 안에 묘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죽은 자의 공간이 산자들에게 휴식과 명상의 기회를 주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좀 다르다. 문화적 차이 탓이겠지만 분명한 격리의 울타리가 쳐져 있다. 묘지는 삶의 현장에서 멀찌감치 밀려나 있다. 삶은 죽음을 외면하고 구태여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게 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말로는 '언젠가는 갈 인생'이라며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잠재적으론 자신의 불멸성을 믿는다. 삶을 마감하는 그 벼랑의 순간까지도 소생의 기회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고 한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말한다.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인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우리는 죽음이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다"고..
실체적 유한성과 불멸을 믿는 허위의식, 그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우리 삶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허망한 삶의 끝을 간접 체험하는 기회라도 가져 본다면 하루 하루의 '들숨 날숨'이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 돈을 벌고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의 얘기다. 어느 날 프랑스 신문이 큰 오보를 냈다. '죽음의 상인 노벨이 죽다'란 제목으로. 그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었는데 이 신문이 실수로 기사를 잘못 쓴 것이다. 하지만 이일은 노벨에게는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양약이 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죽음의 상인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결국 그는 업종은 바꾸지 못했지만 벌어들인 돈을 좋은 일에 쓰기 시작했고 재산의 94%를 내놓아 노벨상을 제정했다. 신문의 오보로 노벨은 헛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가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청명한 하늘 아래 제 3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사망기사를 미리 한 번 써보는 것은 어떨까? 주관적 밀실의 틀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정당화시켜온 허구와 방어논리들이 깨지고 앞으로의 생을 종전보다 좀 더 깔끔하게, 의미있게 살아갈 눈이 열리지 않을까? 횡으로 종으로 크고 작은 삶의 현장의 구조에 가위 눌려 온 삶이 더 큰 자유의 공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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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설가 임어당은 '무덤들 사이로 거닐며'에서 죽음이 주는 자유의 패러독스를 노래한다. "홀연히 나는 내 목숨이 어느 순간에 끝날 것을 본다. 내가 죽음과 그렇게 가까운 것을 보는 순간 즉시로 나는 내 생 안에서 자유로워진다,"
살아 있는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젠가 박동치는 호흡의 출구를 빠져나가 영면의 입구로 들어서게 된다. 임상조사 결과를 보면 죽음의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죽음의 삶의 끝인지 새로운 뭔가의 시작인지에 대해서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는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언젠가 커튼이 내려질 내 삶을 어리석지 않게, 타인을 아프게 하기 보다 행복하게 해주며,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는 데 도움을 주며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잇따른 죽음을 목도하며 맞이한 이 가을. 삶 속에서 죽음을 늘 받아들이며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던 소월처럼 충만하고 철학적인 삶에 눈을 돌려보면 어떨까?